서울생각, 평양생각: 추석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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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애

어제가 바로 음력 8월15일, 추석이었습니다. 이곳 남한에서는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입니다. 옛날 속담에도 조상을 잘 모셔야 집안 일이 잘 된다는 말이 있는데, 남한에서는 추석명절을 크게 지냅니다. 열흘 전부터 서울시내는 추석 명절 분비로 장터마다 길거리마다 분주한 모습이었지만, 그럴수록 저는 쓸쓸한 마음이 더합니다.

부모님도 더욱 그리워집니다. 고향집 문 밖에서 오늘 올까 내일 올까, 밤에라도 문뜩 자식이 들어설 것만 같아 문도 잠그지 못하고 주무셨다는 어머님! 불효자식인 이 딸과 손녀, 손자를 애타게 부르며 눈도 채 감지 못한 채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입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은 저는 용서해 달라는 말 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말을 속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되 뇌이곤 합니다. 통일이 되면 제일 먼저 어머님 산소를 찾아 용서를 빌 생각입니다.

8월에 저는 남한에서 극적으로 만난 외삼촌의 장례식에 갔습니다. 저는 남한에 와서 전쟁 중에 월남했던 외삼촌과 해방 전에 일본으로 간 줄로만 알았던 이모님을 찾았습니다. 80 고령에 얼굴도 몰랐던 조카를 찾았고, 고향 소식을 들으며 기뻐했던 삼촌이 신장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외삼촌은 6.25 전쟁 때, 갓 태어난 아들과 사랑하는 마누라를 고향에 두고, 남한 군대를 따라 월남했습니다. 북한에 있는 제 외사촌 오빠는 남쪽으로 월남한 아버지 때문에 입당도 못하고, 장가도 들지 못했습니다. 나이 마흔이 돼서야 제 어머니가 평양에서 좋은 상품을 사다가 처녀에게 뇌물로 주고, 결혼을 시켜줬습니다. 지금도 북한에 있는 외숙모는 아들 하나를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리며 통일될 날만을 손꼽아가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삼촌이 50년 동안 하루도 잊어본 적 없는 사랑하는 가족과 전화통화를 시켜주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삼촌은 사랑하는 아들의 목소리도 들어보지 못한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전화를 받고 달려간 저는 너무 기가막혀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세상을 떠난 외삼촌보다도 고향에 있는 외숙모와 외사촌 오빠를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1950년에 남한에 온 외삼촌은 공군에서 군복무를 했고, 군 생활을 하며 새장가를 가서 3남2녀를 가진 평범한 아버지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 남한에 있는 외사촌 동생들에게 삼촌의 고향인 북한에 형이 있다는 말을 끝내 해주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사실은 돌아가신 외삼촌과 이모, 저 이렇게 셋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됐습니다. ‘삼촌의 장례식에는 맏상제인 북에 있는 외사촌 오빠가 있어야 하는데... 저 동생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 오빠는 얼마나 기뻐할까... 서로 알고 지낸다면 마음으로나마 외롭지 않을 텐데....‘하는 생각으로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장례식 뒤 고향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늙으신 외숙모님과 외사촌 오빠가 전화통화를 하려고 멀리 국경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자식 하나를 데리고 사랑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50년 동안 산골에서 고생하며 살아오신 외숙모님에게 차마 삼촌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은 외사촌 오빠는 “우리 아버지가 정말?” 하는 소리와 함께 큰 소리로 엉엉 울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58년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어색한 말, ‘아버지’라는 말! 정말 저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이런 비극이 현실이라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저도 이십년 만에 외사촌 오빠와 통화하면서 그저 눈물만 흘렸습니다. 저는 외사촌 오빠에게 비록 저는 고향에 갈 수 없어도 저의 몫까지 외숙모를 잘 모셔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통일이 되면 지금까지 다하지 못한 도리를 다 하겠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