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전방 부대의 늦가을 풍경

강원도 양구 백두산부대 최전방 GOP 소초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군인들.
강원도 양구 백두산부대 최전방 GOP 소초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군인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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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저는 북한이 빤히 바라다 보이는 강원도 고성에서 근무하고 있는 군인들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아침 새벽 첫 전철을 타고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를 바꿔 탔습니다. 약 3시간 정도 달리니 진부령 고개를 넘어갔습니다. 며칠 전까지 만해도 단풍으로 웅장하고 아름답던 진부령 고개가 아니었습니다. 며칠째 연이어 내리던 늦가을 비바람으로 인해 아름답던 단풍잎이 다 떨어져 어느새 가랑잎 몇 잎이 남아있는 앙상한 나무로 변해 있었습니다.

누런 가랑잎으로 변해 떨어지고 있는 낙엽을 보면서 아쉬운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변덕스러운 날씨에 난데없이 소낙비가 내립니다. 간성 터미널에 버스가 도착하자 갑자기 내리는 소낙비로 인해 사람들은 우비를 구입하느라 마트로 뛰어 갑니다. 저는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고는 시간의 여유가 있어 터미널 옆에 있는 손칼국수 집으로 들어가 따끈한 칼국수 한 그릇을 비웠습니다.

남 보기에도 혼자 음식점에 앉아 먹기에는 조금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소낙비가 내리는 날 김이 몰몰 나는 따끈한 바지락 손칼국수 맛도 괜찮았습니다. 시원한 손칼국수 한 그릇을 비우니 어느새 장교님이 차를 가지고 마중 나왔습니다. 강원도 민통선 초소를 지나 거의 1시간 30분 정도 달렸습니다. 억수로 쏟아지는 소낙비에 구름까지 많이 끼다 보니 해발 700m 높이 고지로 달리는 지프차의 속도는 너무 느렸습니다.

속도의 바늘은 20km라는 눈금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제 마음은 긴장되었습니다. 산 정상 위로 겨우 자동차 한 대 지나갈 만큼의 도로가 나 있었는데 양옆에는 가파른 절벽이었습니다. 안개 때문에 산 아래는 볼 수 없었으나 때로는 도로가 가파르다 보니 차 안에 누워서 가는 기분도 들기도 하고 때로는 엎드려 내려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철책이 보였습니다.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장교님은 저에게 좋은 날씨에는 북한 군인들의 고사기관총이 빤히 보이기도 하고 북한 군인들이 농사를 짓는 모습도 보인다고 얘기합니다. 북한 군인들은 무슨 농사를 많이 짓는지 질문도 해 옵니다.

사실 북한 군인들은 웬만한 부식물은 모두 자체 해결입니다. 중대마다 돼지도 기르고 토끼나 염소도 길러 자체 해결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또 모내기 전투와 김매기 전투, 가을걷이 전투에 참여하다 보니 웬만한 농사는 군인들이 다 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북한 군인들의 현실 그대로 답해주었습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한참하고 있는데 초소에서 근무를 수행하고 있던 군인들이 손을 들어 경례를 합니다. 순간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답례의 인사를 했습니다. 억수로 쏟아지는 강한 비바람에도 끄덕 하지 않고 금성철벽으로 나라를 지켜 주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든든해지고 자랑스럽고 비록 내 아들은 아니지만 내 아들처럼 대견한 마음과 더불어 짠합니다.

어느새 차를 달려 소초로 들어갔습니다. 부대 간부는 군인들이 근무를 교대하면 인차 군복을 갈아 입혀 말리도록 하고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휴식도 시키라고 지시를 합니다. 순간 저 역시 지나간 군복무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한때 나에게도 저런 시절의 모습이 있었는데, 갓 장교가 되어 소대장으로 배치되어 중대에 도착했던 그날도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그 당시 고사총 진지 보초근무를 수행하고 들어오는 대원들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개인 비옷을 걸치긴 했지만 군복이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소대원들이 잠든 병실에 들어서니 젖은 군복을 그냥 벗어 둔 채 피곤에 몰려 자고 있었습니다. 순간 대원들의 옷을 말려야 한다는 생각에 난로에 쭈그리고 앉아 비에 젖은 군복과 신발과 젖은 양말을 깨끗이 빨아 말리고 흰목달개도 교체해 달아 주었습니다.

비록 지금의 처지와 환경과는 달라도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장병이 따끈한 커피한잔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하며 저는 커피 한잔을 받아 손에 들었는데 구수한 커피 냄새에 취해 그만 목이 메고 마음이 또 한 번 짠해 졌습니다. 제 강의를 듣는 내내 그들의 눈에는 광채가 돌았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다시 차를 타고 산 정상을 내려오고 있는데 어느새 굵은 빗줄기가 모여 강물 흐르듯이 마치 계곡의 폭포물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그야말로 가물에 왔다가 홍수를 만난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만 마음은 즐거웠습니다. 물 좋고 공기 좋은 높은 거봉산의 산세와 절경은 북한의 묘향산도 금강산도 왔다 울고 갈 정도였습니다. 머루다래를 비롯한 산열매와 약초도 많을 듯 했습니다. 간성 터미널을 지나 아침에 넘어간 진부령 고개를 다시 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이었습니다. 진부령 넘자 서울 쪽에는 한 방울의 비도 내린 흔적이 없었습니다. 서울로 오는 내내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내 나이 조금 젊었으면 군복을 입고 진정한 내 나라를 위해 군복무를 한 번 더 멋지게 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면서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