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보신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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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애

어느 해 인가부터는 외국인들이 평양을 많이 방문하게 되면서 어떤 나라사람들은 개를 조상처럼 생각하고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미개한 사람으로 생각을 한다면서 개장 집을 단고기국 집으로 고쳤습니다. 하여 지금은 개장 집을 단고기국 집으로 불 리우고 있답니다. 저는 보신탕을 먹었는가 하는 전화를 받을 대마다 농담어린 말로 누가 사주는 사람도 없고 함께 먹어 줄 사람도 없다고 하여 웃겼습니다.

보신탕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되자 정말 뜨끈뜨끈한 보신탕에 소주가 생각이 났습니다. 주말만 기다렸습니다. 마치도 어린아이들처럼 말입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 퇴근시간이 오자 저는 친구 영순 이에게 주말오후에는 다른 약속을 잡지 말라고 미리 전화를 하였습니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면서 그러겠다고 영순 씨는 저의 약속에 응하였습니다.

다음날 영순씨를 비롯한 다른 친구2명과 함께 전철을 타고 서울을 벗어나 서정리 역으로 갔습니다. 이미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전문 보신탕 집이였습니다. 푹 삶은 큼직큼직한 개고기 갈비를 전문으로 하는 집이였습니다. 이곳 남한에 와 고향생각이 날 때 마다 많은 보신탕집을 다녀 봤지만 거리는 조금 멀어도 이집 맛은 정말 고향의 그 맛 이였습니다.

친구들은 서울도 아닌 경기도 평택 쪽인 이집을 어떻게 알게 되였는가. 고 자꾸자꾸 묻는 말에 저는 농담으로 비밀이라고 하자 그들은 애인이라도 생겼는가, 애인과 함께 왔던 아지트인가, 고 놀리는 바람에 저는 사위의 안내를 받아 아이들과 함께 왔던, 저에게는 아주 뜻이 있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친구들은 저를 보고 팔방미인이라면서 모르는 곳이 없고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고 하여 또 한번 크게 웃었습니다. 우리는 소주한잔을 들고 우리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라는 소리와 함께 건배를 했습니다. 저는 소주를 마시고 뜨거운 보신탕국물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었습니다. 속이 시원했습니다. 영순 씨는 큰 갈비를 뜯으며 북한에서의 아동영화 소년장수에 나오는 호비에 대한 말을 하여 웃었습니다.

우리들이 떠드는 말씨에 접대원 아줌마는 중국 사람이 아닌가, 고 묻는 말에 저는 아님다. 우리는 윗동네 사람들입 네다. 하고 빈정을 댔습니다. 접대원 아줌마는 조금 어색했는지 자기가 중국 교포라고 하면서 고향사람들인가 했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우리는 분위기를 돌려 이곳 남한 식으로 술잔을 차례로 돌렸습니다.

여자 셋이 모이면 먹는 소리로 시작하여 애기 낳는 소리로 끝낸다더니 여자 넷이 모여 술을 마시니 정말 다사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온 천지가 다 우리의 것인 듯했습니다. 한 두 시간을 식당에서 웃고 떠들며 마시고 또 마시고 먹고 또 먹었습니다. 결산은 제가 했습니다. 제 2차는 노래방으로 명희가 냈습니다. 서정리 역 노래방은 낯선 고장이라 얌전을 피웠지만 시간이 얼마 흘러가자 저는 맥주 한잔을 들고 사장님에게 권하며 써 비스를 많이 달라고 했습니다.

영순이는 꾀꼴 새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다른 친구들이 제각기 다른 동작으로 춤을 추는 모습이 참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조용한 서 정리 역 주변에서 보냈습니다. 저녁 9시가 되여 우리는 전철을 타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전철을 타고 오면서 우리는 이런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우리가 북한에 있었다면 이렇게 여자들이 몇 시간도 아닌 하루 종일 집을 비우고 먹고 싶은 것을 먹으러 또 술을 마시고 놀러 다닐 수가 있었을까? 아마 북한 같으면 남편들에게 당장 쫓겨 날것이고 당 생활 총화에 수정주의 날라리라고 강한 비판을 받고 추방 될 것이라고 한 사람처럼 말했습니다. 아니 북한 같으면 가정주부들이 하루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여다녀도 모자라는 시간에 감히 이런 생각이나 할 수가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정말 우리가 이곳 남한에 온 것이 정말 행운이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복이야. 하며 수다를 떨었습니다. 진정 우리는 복을 쥐고 태여 난 것만 같았습니다.

비록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천국에 온 기분입니다. 한사람 같이 저희 친구들은 열심이 살고 있답니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나날이 행복해 지는 저의 모습은 정말 그 어디에 비 길데 없습니다. 이런 행복한 생활이 지속되면 될 수록 자꾸만 고향의 친구들이 더욱 그리워 집니다. 하루 빨리 통일 열차가 남북을 오고 가면서 이산가족의 상봉을 자유롭게 열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항상 기원하면서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