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중순이었습니다. 밤10시가 되어 퇴근한 아들이 두툼한 돈 봉투를 저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돈 봉투를 받아 안은 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돈이 이렇게 많은 가고 말입니다. 봉투에서 돈을 꺼내 헤기 시작 했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모두 160만원, 미화로 약 천8백 달러로, 웬만한 회사직원의 봉급이었습니다.
누나들은 첫 월급을 탔으면 식구들의 속옷이라도 챙기든지 아니면 한턱 쏴야지. 하여 모두가 웃었습니다. 저는 아들의 첫 월급봉투를 받아 안은 순간 눈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기쁨의 눈물이 면서도 대견한 마음의 눈물 이였습니다. 아들을 낳았을 때 솔직히 우리부부는 아들의 신세를 질까. 장가가는 아들을 볼 수 있을까. 하는 말을 너무도 많이 주고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왜냐면 셋째 늦둥이 였고 북한에서는 군복무를 10년을 마쳐야 사회생활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60이 퍽 전인 이른 나이에 아들의 월급봉투를 받게 되는 것이 꿈만 같습니다. 비록 아빠가 없지만 무조건 대학 공부를 시키는 것이 저의 행복이었고 꿈이었습니다. 남한에 온 첫날부터 희망과 포부. 목표를 달성하기위해 모든 성심을 다했습니다.
작년가을부터 제가 잠시 사정으로 일을 못하게 되자 아들은 방학에 알바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승인을 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자본주의 경제 사회에서는 어떤 어려운 속에서도 꿋꿋이 설수 있도록 자립성을 키워주는 것도 좋은 점이 아닌가하고 생각을 하고 허락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아들은 1년 동안 사회생활을 하고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 하여 사실 요즘 저는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 남한 분들에게 이런 때는 어떻게 했으면 좋은가, 고 묻기도 하여보았습니다. 적은 나이도 아니라 사회생활도 나름대로 겪고 다시 대학을 가도 늦지 않으며 그런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는 말에 저는 인제는 조금 안심이 되는 듯 하였는데 아들의 첫 월급봉투를 받는 순간 가슴이 뿌듯하였습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들의 모습과 저녁 늦게 들어오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면 마음이 저려 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랍니다. 잘 이겨내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정말 대견 하였습니다. 옛날 이런 속담이 있답니다. 3대 머저리 중하나가 제 자식 자랑하는 부모라는 말. 그래도 저는 항상 아빠 없이 엄마 속을 태우지 않고 엄마의 말을 잘 따라주고 어렵고 힘든 남한 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이 대견하여 항상 자랑이랍니다.
사실 제일 힘들었던 고난의 시기인 1997년 12살 철없고 어린 아들을 아빠에게 맡겨 놓고 딸을 찾아 생각지 않은 탈북을 하였습니다. 생떼 같은 아빠를 잃은 아들은 공부를 마음껏 하지 못했습니다. 어린 아들에게 너무도 많은 상처를 준 것이 항상 마음이 아파 북한에서 하지 못했던 공부를 위해 대학 공부를 시키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조금 힘들어도 극복하고 조금만 참고 견디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생활방식을 저는 아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무리 일을 하고 성실히 살아도 고향에서는 헐벗고 굶주렸지만 이곳 남한에서는 본인만 성실하고 열성만 있으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자원은 풍부합니다.
지난 과거를 잊지 않고 자본주의 경쟁 속에서 무조건 자립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키워주겠습니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쓰는 방법도 가르쳐 고기를 먹는 법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과 먹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엄마로서 부모로서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저는 새삼스럽게 알게 되였습니다. 다음날 저는 아이들과 함께 가정 식당으로 갔습니다.
시원한 사이다와 매운 해물탕을 먹고 노래방까지 갔습니다. 저에게는 금쪽같은 자식들이 큰 재산이며 둘도 없는 행복입니다. 이제 저의 꿈과 희망은 아이들을 위해 아빠의 몫까지. 그 어떤 강풍이 불어도 끄떡 않도록 지켜주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여 대한민국을 위해 조국을 위해 나라의 기둥이 되도록 주춧돌로 키우겠습니다.
아들의 첫 월급으로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의 생신에 서울식 치마저고리 한 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손자가 정성들여 보내준 연분홍 진달래색 치마저고리를 입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 어머님의 모습을 그려보며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