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애
지금 서울은 거리와 마을마다 빨간 장미꽃이 활짝 피워 더없이 아름답습니다. 창문을 열면 장미 꽃 향기가 솔솔 들어 와 술에 취하듯 꽃향기에 취하기도 하며 길을 걷다가도 저도 모르게 아름다운 빨간 장미를 손에 쥐고 야 하는 감탄이 저절로 쏟아져 나온답니다.
5월 말부터 6월말까지 과천 서울 대공원뿐만 아니라 남한의 여러 곳에서는 여름철 장미 꽃 축제가 한창입니다. 정말 이곳 남한에는 봄에는 봄꽃 축제. 여름에는 또한 아름다운 빨간 장미 꽃 축제. 가을에는 과일 축제. 이외에도 인삼 축제. 단풍 축제 등등. 수없이 즐겁고 재미있는 놀이가 많습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장미 꽃 축제는 아름답고 순수한 연인들이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주며 알콩달콩 사랑을 약속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봄꽃 축제로부터 여름 가을 겨울에 진행되는 모든 축제를 친구들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느려 볼 기분입니다. 이러고 보니 저도 인제는 이곳 남한의 문화적인 생활풍습에 적응 하고 있는 것 같네요. 저는 주말에 친구들과 서울 대공원으로 가게 약속이 되여 있어 주말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일정이 뜻 밖에도 저 때문에 변해 버렸습니다. 이곳 남한에서 알게 된 저와 같은 탈북자인데 동생처럼 지내고 있는 동생이 뜻하지 않은 일로 사고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정신없이 달려갔습니다. 큰 사고는 아니지만 어쨌든 사고는 사고라 그의 마음을 안정 시켜 주느라 소주 한잔 했습니다. 시간은 어느덧 지났습니다. 약속이 되였던 친구들은 매우 저 때문에 장미 꽃 구경을 못했다면서 섭섭해 했습니다. 저는 집 주변 어디 가까운 곳에 바람이라도 쏘일 겸 숙영이 에게 전화 했더니 부천에도 장미 꽃 축제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5시 되여 우리는 숙영이 친구의 차를 타고 부천으로 갔습니다. 1시간 30분이 걸려 우리는 수천 도당 공원 장미 꽃 축제장에 도착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도 장미 꽃물결처럼 출렁 이였습니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니 가수들을 비롯한 예술인들이 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 어울려 우리는 사진도 찍기기도 하고 꽃을 입에 대고 아름답고 그윽한 향기에 취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우리는 백만 송이장미 은이라고 쓴 곳으로 갔습니다. 빨간 장미 노란 장미 연 분홍 장미 여러 가지의 색을 띤 장미를 보면서 우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이쁜 꽃들이 왜 북한에는 흔하지 않은 가고. 7월이면 꽃한송이 때문에 애를 태우던 말을 한사람같이 했습니다. 동상에 꽃을 드려야 하는 본인은 물론 무조건 꽃을 가져가야 된다고 떼를 쓰는 철부지아이들을 놓고 눈물도 흘렸다는 숙영씨의 말을 듣자 그의 친구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이해를 못해 우리는 한참을 북한 실정에 대해 몇 마디의 말을 해 주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위해 한번은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또 30리길을 걸어 들판에 있는 야생 들국화를 꺽어 다가 아이들손에 쥐여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칭찬은커녕 사상성이 없다고 소년단 생활 총화에 비판을 받았다고 울면서 돌아온 자식을 보는 순간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번은 꽃이 없어 앞마당에 핀 아편 꽃을 가져갔다가 시들어 동상에 드리지 못했다고 부모를 잘 못 만나 고생을 한다고 표현 하는 자식들을 패주고 울다가 자는 아이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린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꽃한송이를 놓고도 지난 아 푼 추억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한에 온 우리 탈북자들의 한결같은 마음 일 것이라고 우리는 말을 했습니다. 의자에 앉아 이런 추억속에 잠겨 있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 어르신이 고향이 어딘가 고 물었습니다. 북한이라는 것과 탈북자라는 말을 듣자 그 어르신은 자기도 북한이 고향이라며 눈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향에 두고 온 처자식을 그리워했습니다.
아름다운 빨간 장미꽃과 함께 두 시간을 보냈습니다. 시원한 저녁이라 많은 사람들이 끊기질 않았습니다. 저는 핸드폰으로 많은 사진을 찍었고 숙영의 친구가 가지고 온 사진기로 우리는 즐겁고 행복한 모습 그대로 사진기에 담았습니다. 저는 철이 없던 학창시절에 명언처럼 자주 하던 이런 말이 생각났습니다. <장미꽃이 아름답다 하여 함부로 손대지 말라. 아름다운 장미의 뒤에는 가시가 있다>는 말을 주절대며 처녀시절 너무도 많이 까불었는데 인제는 호박꽃이 되여 봐주는 사람도 없으니 하고 우리는 크게 웃었습니다. 저는 항상 옆에 있는 친구들이 좋았습니다. 기쁨도 슬픔도 함께 해주는 친구들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차를 타고 집으로 오던 우리는 부천 터미널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작동 동태 찜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벌벌한 동태 찜에 저는 밥을 한 공기를 게 눈 감추듯이 먹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며 우리는 통일이 되여 고향에 아름다운 빨간 장미를 많이 심어 고향에서 장미꽃 축제를 하여 고향 사람들을 행복하고 즐겁게 해주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평양의 넓은 광장에 갖 가지색갈의 장미꽃으로 아름답게 장식하게 될 그날을 위해 항상 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