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도봉산 등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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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꼽아 기다리던 주말 저는 등산복을 입고 전철을 타고 도봉산역으로 갔습니다. 얼마나 등산객들이 많은지 저는 한참만에야 제가 속한 친목회 일행을 찾았습니다. 도봉산으로 올라 가는데 길 양쪽에는 많은 음식점들이 있는데 아침을 안 먹은 저는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올라가는 도중에 저는 제일로 맛이 좋은 듯 해 보이는 김밥 두 줄과 깡통맥주 두병을 샀고 삶은 계란 세 알을 샀습니다. 저는 그 많은 등산객들과 마치도 경쟁이라도 하는 듯이 부지런히 올랐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가 등산학교를 지나 작은 절간을 지나고 보니 산골짜기에서 맑은 물이 흘렀습니다. 그 맑은 산골 물에 손을 담그고 싶은 마음이 충돌이 생겨 저는 산기슭으로 내려갔습니다.

엎드려 한 모금 들이마셨습니다.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정상에 오르기 전에 우리는 쉬면서 사가지고 올라간 맥주와 김밥을 먹었습니다. 정말 별맛이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잘 먹지 않던 김밥을 게눈 감추듯이 한 줄을 다 먹고는 개울물을 한 모금 또 마시며 순간 고향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가 학교 시절 묘향산 견학을 갔을 때 룡연 폭포에서 내려오는 물을 엎드려 먹다가 펑덩 빠진 일이 있습니다. 물맛이 그때 그 맛 같았습니다.

이런 산골 물에 어죽을 쑤어 먹기도 하고 목욕을 하는 환상도 해보았습니다. 한참을 쉬고 다시 정상에 올라갔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정일 봉이다. 라고 소리쳐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50미터가 넘어 보이는 까마득한 절벽이 있었는데 벼랑을 타고 오르는 사람이 아물아물하게 보였습니다.

더욱이 놀란 것은 직승기가 계속 등산객들을 위해 빙빙 하늘에서 돌고 있는 것이고 밑에는 119구조대 차와 병원 구급차가 항상 대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봉산에는 3개의 절간이 있었는데 모두가 중국어로 써있었습니다. 무슨 절간인가 묻지도 못했습니다. 친목회원들은 거의 모두가 남한 사람들이라 저는 중국어를 모르는 것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묻지도 못했습니다.

제가 지난날 지방에가 본 절은 우리말로 절의 이름이 씌워져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도봉산의 절은 모두가 중국어로 씌워져 있었습니다. 정상에서 조금 쉬다가 다시 내려 왔습니다. 등산을 하면서도 가파fms 벼랑을 배경으로 또는 활짝 핀 진달래꽃 속에 파묻혀 사진을 찍기도 하였습니다. 시인마을과 커피숍을 지나고 또는 서원 교를 지나 내려오면서 쌍 줄기 약수터에서 시원한 약수를 마셨습니다.

약수를 마시면서 저는 6.25 전쟁시기 북한에서 이곳 남한으로 내려오신 노인장을 만나게 되였습니다. 그 노인장은 제가 친구에게 하는 말을 듣더니 고향이 어딘가도 물었습니다. 저는 고향이 평양이며 저의 친구는 강원도 원산이라는 말을 듣고는 고향 생각이 난다면서 자기 집에 가식사도 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가라고 하였습니다. 노인장 집은 바로 도봉산 밑에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그 분이 운영하는 오마이 삽겹살 집에서 점심을 먹었고 그로인은 두 명의 친구들을 불렀습니다. 노인장 고향은 개성이었고 친구들의 고향은 해주였습니다. 해주가 고향인 노인장은 작년에 평양관광을 다녀온 말을 하였고 해주가 고향인 노인장은 금강산 관광을 다녀온 말을 하여 저는 고향생각으로 눈물이 글썽하였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어려서부터 6.25 전쟁은 남한이 먼저 일으킨 것으로 교육을 받아 왔건만 새빨간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작년에 평양을 다녀오셨다는 노인장은 1세대가 죽으면 2세대는 고향을 찾을 수가 없다면서 고향을 못내 그리며 눈에 눈물까지 보였습니다. 세 노인장은 하나 같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아침에 자고 나면 뉴스를 보면서 통일 된다는 말은 없는지. 죽기 전에 통일이 되여 꼭 고향에 한번 가 보는 것이 원이 없다고 말입니다.

저는 하루 빨리 북한이 개방이라도 되여 편지와 전화통화가 자유롭게 이 루 워 지고 소포라도 오고 갈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이산가족 방문이라도 자유롭게 변함이 없이 계속 진행 되였으면 하였습니다. 언제이면 우리 탈북자들도 이산가족의 대열에 당당히 서서 헤어진 가족과 만나게 될지. 과연 그날은 올까. 그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램을 항상 기원하면서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