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평양에선 요즘, 한창 김장철입니다. 김장때마다, 소금물에 절여 놓은 배추 씻을 물을 마련하기 위해 이리 저리 부산떨었습니다.
시간제로 나오는 물을 한꺼번에 받아 놓아야 하니,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우시시한 몸으로 옆집 수도도 빌리고 아랫집 수도도 빌려가며 빈 독 채우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십년도 넘은 기억입니다.
지난 주말, 저는 경기도 부천에 살고 있는 사촌시누이 집을 다녀왔습니다.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 이곳 서울에서는 조금 이른 감은 있으나 김장 김치를 담그고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하던 김장에 반에 반도 안 되는 적은 양이었지만, 저도 손을 걷고 거들었습니다.
깨끗이 씻은 배추에 빨간 양념을 골고루 발라 김치 통에 차곡차곡 넣고 있자니, 고향 생각이 절로 납니다. 평양은 이곳 서울 날씨에 비하면 지금 이맘때면 추운 계절이랍니다.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에도 밥 반찬감이 마땅히 없어서 집집마다 겨울 김치는 반 년 먹을 식량입니다. 보통이 500-700 키로 김치를 했는데, 이 남쪽에 와보니 배추가 사시사철 나오고 다른 반찬도 있어서, 김장이라고 해도 배추 20-30통 담글까 말까 합니다.
저의 식구 5명에 보통 한 톤은 해야 만이 한해 겨울 양식으로 다음 해에 시금치를 비롯한 채소가 나올 때가지 먹을 수 있었답니다. 그 많은 김치를 하려면 혼자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동네 옆집, 앞집.. 이웃 사는 아줌마들과 꽁꽁 얼어드는 손과 발을 녹여 가며 창고 양지쪽에 모여 앉아 수다를 떨어 가며 배추에 양념을 무쳤습니다. 이렇게 양념한 배추를 제 키보다도 배로 큰 독에 거꾸로 엎드려 다져 넣었습니다.
더욱 재미있었던 추억은 김장을 모두 마치고 난, 늦은 저녁 때 일입니다. 김이 물물 나는 뜨끈뜨끈한 삶은 고구마와 배추 꼬개기에 매운 양념을 발라 먹던 일, 매운 양념에 땀을 벌벌 흘리며 강냉이밥을 비벼 먹으며 수다를 떨던 동네 아줌마들의 얼굴 모습이 생생하게 안겨옵니다.
이런 저런 고향 생각에 서둘러 양념을 넣지 않았는데도, 배추 30통 버무려넣은 남쪽의 김장은 잠깐 사이에 끝났습니다.
저는 지난 옛 시절이 새삼스러워, 고향 식으로 김장을 마무리 해보기로 했습니다. 김치 양념에 흰 쌀밥을 비볐습니다. 커다란 바가지에 오이 냉채와 시금치나물, 고사리나물과 함께 양념을 섞어 빨갛게 비벼 놓았습니다. 소주 한잔씩 마신 남자들이 먹음직스럽고 시원해 보인다면서 저저마다 한 공기씩 먹으며 맛있다고 별 맛이라고 칭찬들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만은 옛 고향에서 동네 아줌마들과 함께 먹었던 그 맛이 아닌 듯 했습니다.
사실, 북한 김치는 이곳 남한 김치에 비해 더 깔끔하고 시원하고 담백하답니다. 이곳 남한 김치는 양념에 이것저것 들어가는 것이 너무 많아 저 입맛에는 감칠맛이 별로 나지 않습니다. 저는 이곳 남쪽 사람들과 식사를 함께할 일이 있으면 꼭 이런 북한 김치 자랑을 빼놓지 않습니다. 언젠가 한번 맛보여 준다고 장담을 하긴 했지만, 북한식 김치는 여기서는 그 맛이 그대로 나진 않는답니다. 아마 고향에서 담가야, 제가 그토록 자랑했던 진짜 북한식 김치를 맛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저는 갓 담근 김장 김치를 받아들고 시누이 집을 나섰습니다. 집으로 오는 길, 흐뭇한 마음이었습니다.
고향 생각이 많이 났지만, 따뜻한 사람, 나의 가족들 그리고 친척들이 이제 여기 이곳에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 겨울, 새로운 가족을 만난 저는 좀 더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디, 고향에서 함께 김장을 담그던 그 친구들도 풍족하고 따뜻한 겨울을 보내기를 빌어봅니다. 언젠가는 함께 손 비벼가며 김장할 날이 또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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