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이 웃음짓고 있는 사진 속의 어머니는 저에게는 언제나 존경스럽고 다정다감하셨으며, 우리 7남매에게 강한 어머님이셨습니다.
직업 때문에 항상 지방 출장을 가셔서 1년에 한두번 겨우 집에 오시나마나 해도 얼굴 색 한번 변하지 않으시고, 아빠의 빈자리까지 채워 주셨고 엄마 사랑 아빠 사랑까지 전부 주셨던 강한 어머님이셨습니다.
저는 이곳 남한에서 '엄마는 여자보다 강하다'는 말을 자주 들을 때마다 저를 낳아 주시고, 강하고 바르게 키워 주신 어머님을 항상 생각합니다.
강한 소낙비 소리와 함께 미소를 짓는 사진속 어머님의 모습을 보며 이 세상에서 우리 엄마들만큼 강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옛날 북한에는 '곡절 많은 운명'이라는 예술영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항상 어렵고, 힘들 때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을 생각하며, 우리 탈북자들은 참 곡절 많은 운명의 주인공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식량 공급이 중단된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저는 엄마의 강한 모습으로 어린 자식들을 위해 갓 수술한 중환자임에도 불구하고, 머나먼 황해도로 떠났고, 강냉이 70킬로그램을 머리에 이고 잔등에 지고 옆구리에 끼고 들고, 먼 진창길을 걸으면서도 우리 아이들이 배불리 먹으며 밝게 웃을 그 모습을 생각하며 힘든 줄을 몰랐고, 집 근처인 대동강 역에 도착해 정신을 잃고 제일 먼저 찾은 것도 금쪽같은 우리 아이들이었습니다.
정전이 돼서 며칠씩 못 가게 된 열차를 타기 위해 이제 겨우 8개월 된 아기를 잔등에 업고, 4살 밖에 안된 아이를 앞에 안고 열차의 높은 창문을 뜀박질해 올라 많은 군인들과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도 강한 엄마의 모습이었습니다.
중국에서의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강한 엄마였기 때문에 두 차례에 걸쳐 북한 보위부와 무산군 노동단련대나 청진 집결소에서 인간이 아닌 생활 속에서도 어린 자식을 지키기 위해 담당 안전원과 책임자들에게 갖은 수모와 멸시를 받고 매를 맞아 이빨이 부러지면서도 3차에 걸쳐 속도 빠른 두만강 물을 건너 이렇게 이곳 남한에 올 수 있었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설은 이국 땅에서 인신매매군들에게 빼앗겼던 자식을 3개월 만에 찾고, 먼저 탈북한 자식과 한마디 말도 없이 고향에 두고 왔던 금쪽같은 자식을 7년 만에 상봉할 수 있었던 것도 강한 엄마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말 지난 추억 속에는 눈에 흙이 들어가도 잊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장편소설을 쓴다고 해도 몇 집은 될 것이고 영화를 만든다면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으며 며칠을 밤새워 가며 이야기해도 말로 다 표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곳 남한에 온 우리 탈북 여성들은 곡절 많은 운명의 주인공들이며 강한 엄마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자식 하나 지키지 못하는 약한 엄마였으면 오늘과 같은 행복이 있었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감옥에서 딸의 건강을 위해 뱃속에 오이를 훔쳐 손으로 잘라 김치를 만들었고, 먹을 수 없다는 날 강냉이를 강제로 딸에게 먹여가며 말로는 다할 수 없이 힘든 고비를 넘어가며 아이들을 지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엄마는 여자 보다 강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오늘도 북한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가정의 생계를 위해 중국이나 베트남을 비롯한 제 3국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우리 엄마들은 강한 모습으로 가정과 아이들을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