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이라 저는 조금 늦잠을 자고 아침 7시가 되어 일어났습니다. 요즈음은 아이들이 겨울 방학이라 생활이 약간 해이된 듯합니다. 저는 창가로 나가 밖을 내다보는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온 강산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순간 고향 생각이 문뜩 났습니다. 한참이나 많은 생각에 깊이 잠겨있던 저는 친구의 아들 결혼식이 있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하여 저는 방 청소를 부지런히 하고 10시가 되어 준비를 하였습니다.
2년 전부터 네트웍 사업을 함께 하면서 알게 된 친구이자 저를 후원해 준 사장입니다. 그는 고향이 서울이고, 서울에서 나이 60이 되도록 살아왔습니다. 남한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저는 궁금한 점과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밤이나 낮이나 서슴없이 전화로 물어보고 혹은 직접 찾아가 물어보기도 하는 허물없고 부담없는 참 좋은 분이랍니다. 저의 맏딸 결혼 때에도 머나먼 전라도까지 직접 찾아와 저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던 그런 분입니다.
저는 우선 손전화기로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고 11시쯤 되어 약도를 가지고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며 찾아 갔습니다. 예식장에 도착한 저는 2층의 붐비는 많은 사람들 속으로 신부 신랑을 찾아가 축하의 인사를 하고는 축의금을 주고는 3층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별의 별 음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여러 친구들과 식사를 하고 신랑신부가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을 바래주었습니다. 하루 종일 눈은 펑펑 내렸습니다.
하염없이 내리는 티 없이 맑고 깨끗한 흰 눈을 바라보며 저는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과 함께 손을 잡고 어린 아이들처럼 막 달려 보았으면. 그리고 눈사람을 굴리며 지나간 어린 시절을 마음껏 추억해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예식장 밖에서 한참을 서있는데 친구들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다시 식당으로 갔습니다. 약주를 마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소주 한잔 두잔 마시며 친구들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고향인 평양에서는 결혼식을 어떻게 하는 가고 말입니다. 그들의 질문에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내 고향인 평양에서는 12시쯤 되어 여자의 집에서 신부의상을 받고, 신랑신부가 승용차를 타고 평양시를 한 바퀴 돌고, 만수대 동상이나 아름다운 유원지를 찾아가 사진을 찍고, 신랑의 집에 도착하여 여자가 사을 받고는 저녁에 신랑의 직장 동료들과 신부쪽에서 따라간 신부의 친구들이 노래를 부르며 간단한 오락회를 하는 데 대해 상세히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는 결혼식 준비와 관련하여 어느 정도 양복지를 비롯한 솜과 이불감. 그리고 술과 당과류도 조금은 공급을 해주었는데, 그것으로 충족이 안 된다는 것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하며 어떻게 하루아침에 저희들이 북한 실상을 알 수가 있겠는가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서 한생을 살아온 저로서도 지금에 와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많은데 어떻게 그들이 알 수가 있겠습니까? 너무도 부족한 것이 많은 내 고향 주민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지가 정말 궁금하답니다.
저는 저녁에 노래방에 가서 놀다가 집으로 왔습니다. 눈이 내린 저녁 날씨는 그야말로 맵짠 칼바람이 쌩쌩 불었습니다. 저는 이제야 겨울 날씨가 왔구나 하며 집으로 향하였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방학 기간 중 중국식당에서 시간제 일을 하는 아들이 퇴근하여 기쁜 마음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오토바이를 타고 일을 하는 아들에게 저는 힘이 들지 않는가고 물으니 아들은 하나도 힘든 것이 없으며 사장님도 좋은 분이라 신이 나고 재미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남한 분들은 한 사람 같이 좋은 분들이 너무도 주위에 많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속에서 행복하고 즐겁게 생활하는 저는 항상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답니다. 제가 평양에 그냥있었더라면 이런 좋은 분들을 어떻게 만날 수가 있었을까. 이 분들을 알게 되었고 이 분들과 함께 즐거운 세월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저에게 준 복이며 영광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여 저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다는 인사를 합니다.
오늘도 땀을 흘리며 도로에 소복이 쌓인 눈을 쓸고 또 쓸고 있을 내 고향의 주민들을 생각하며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