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보는 한반도 역사] ⑱한반도 최초의 통일 국가는?

워싱턴-이규상 leek@rfa.org
2010.07.13
koryo_3d-305.jpg 고려 태조 왕건과 견훤의 고창(지금의 경북 안동)전투를 다룬 3차원 애니메이션 영상 스크린 캡쳐.
사진-연합뉴스 제공
혼란스럽던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북한의 역사학자들은 고려를 한반도 최초의 통일 국가로 보는 한편 고려의 건국 주체도 호족이 아닌 인민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바로 보는 한반도 역사. 오늘은 고려의 건국을 보는 남과 북의 역사관을 살펴봅니다.

676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220여년이 지난 900년대 초 한반도는 다시 혼란의 시기를 맞습니다. 통일 신라 말, 왕권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신라의 군인이었던 견훤은 반란 세력을 이끌고 무진주, 지금의 광주를 점령한 뒤, 전주로 도읍을 옮겨 후백제를 세웠습니다. 견훤은 또 지금의 충청도와 전라도 일원을 점령하고, 신라의 수도 경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웠습니다.

한편 신라의 왕족이었던 궁예는 901년 지금의 개성을 수도로 삼아 후 고구려를 세운 후 906년에는 국호를 마진이라 바꾸고 수도도 지금의 철원으로 옮겨 국가의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신라의 호족 출신이었던 왕건은 궁예의 부하로 있다가 궁예의 폭정이 심해지자 다른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으로 추대됐습니다. 918년 태조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나라이름을 고려로 짓고 수도를 송악, 지금의 개성으로 옮겼습니다. 이후 신라와 후백제가 망하고 고려는 또다시 한반도를 통일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남한의 대부분 학자들은 통일 신라가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부터 남과 북은 시각을 달리하고 있다고 남한 고려대학교 사학과의 김창현 교수는 말합니다.

김창현: 북쪽에서는 고려의 건국을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통일로 본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고 고려의 통일부터 완전한 통일이라고 보는 것이 북한의 입장이다. 남한에서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대부분 인정을 하면서 신라의 삼국통일의 한계성을 지적하는 정도이다. 그런 입장에서 고려의 건국에 남북이 차이를 두고 있다.

북한이 이렇게 고려의 삼국통일을 한반도 최초의 통일로 규정짓는 것은 북한의 북방정통론에 있다고 김창현 교수는 설명합니다.

김창현: 북한에서는 정통을 북쪽에 두고 있다. 고구려와 발해에 정통을 두기 때문에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대부분의 남한 학자들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고려 건국에 대한 시각이 이것에서 부터 달라진다.

북한은 초기에는 유물사관으로 역사를 해석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인민 대중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주체사관으로 한반도의 역사를 해석해왔습니다. 따라서 고려의 건국 의의에 대한 입장도 초기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 김창현 교숩니다.

김창현: 유물사관에서 주체사관으로 넘어온다고 해서 고려의 통일에 대한 시각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체사관으로 넘어가면서 고려의 통일에 대한 시각이 굳어졌다. 그 전에는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었으나 주체사관으로 넘어가면서는 남쪽의 통일, 신라의 통일에 대해서는 더욱더 부정했다.

김창현 교수는 남쪽에서도 신라의 삼국통일과 고려의 통일에 대한 역사관도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김창현: 남한에서도 남북국에 대한 주장을 학자들이 꽤 주장하고 있다. 통일 신라를 인정하면서도 발해를 인정하자는 절충안도 꽤 늘고 있는 추세이다.

남한에서 주를 이루고 있는 실증사관 학자들은 역사의 정통성이 북쪽에 있었는지 남쪽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별 중요성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의 주체사관 학자들은 역사의 정통성을 아주 중시하고 있다고 김 교수는 설명합니다.

김창현: 정권자체가 북쪽에 있다 보니 그런 것 같다. 정통성을 북쪽에서 찾다보니... 또 북한 정권의 특색이 사회주의 국가이면서도 주체사상을 강조하다 보니 더욱더 정통성을 강조하는 것 같다. 지도자의 입장을 강조하고 그러다 보니 지도자의 정통성을 찾게 되는 것이다...

북한은 이렇게 고려의 건국을 역사적 발전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지만 고려의 건국자인 왕건에 대한 인물 평가는 다른 역사적 인물들, 특히 지도층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입니다.

김창현: 왕건에 대한 인물 평가는 대단히 긍정적으로 본다. 그러나 100% 긍정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라는 기본 틀이 있기 때문에, 노동자와 인민의 입장을 강조하기 때문에 봉건지배자의 한계는 왕건이던 왕건의 후계이던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

고려의 건국을 평가하는 남과 북의 시각 차이는 역사발전의 주체를 보는 데서도 크다고 김창현 교수는 설명합니다.

김창현: 후삼국의 혼란이나 농민봉기라던지 역사적인 주체를 인민에 둔다. 인민의 투쟁 농민의 봉기 등의 활약을 기본적인 역사 동력으로 파악한다. 반면에 남한에서는 농민봉기를 얘기를 하지만 농민봉기가 하나의 계기는 되지만 후 삼국시대를 이끌어간 사람들은 호족이라는 지방 세력이라고 본다.

고려 건국에 대한 남과 북의 시각 차이는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까지 이어져 남과 북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에 대한 평가에서도 판이한 시각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로 보는 한반도 역사. 진행에 이규상입니다.
댓글 달기

아래 양식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십시오. Comments are moder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