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한국인] 북한에 볼모 된 아내와 딸 구출운동 오길남 박사
2012.09.28
북한 땅에 볼모로 잡힌 사랑하는 아내 신숙자 씨와 두 딸 혜원 규원의 구출을 요청하는 하소연의 목소리가 9월 워싱턴의 하늘을 가득 채웠다. 주인공은 바로 오길남 박사다. 그는 미국 국회의원들과 행정부 사람들 그리고 미주 한인들에게도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내 아내와 딸들을 돌려주시오.’라는 글씨와 빛바랜 가족의 사진을 들고 멀리 미국땅에 찾아와 피 마르는 고통을 토로한 것이다.
자유아시아방송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북한에 볼모 된 자신의 아내와 딸 구출운동을 펼치는 오길남 박사를 만나본다.
오길남 박사는 누구인지 알아보자!
1942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난 오길남 씨는 부산고와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한 후 1985년 독일 브레멘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43살의 적지 않은 나이 때문에 대학 강단에 서기 어려워 방황하고 있을 때였다. 작곡가 윤이상, 재독학자 송두율, 김종한 씨 등이 ‘북에 가서 조국을 위해 경제학자로 일해 볼 생각 없느냐?’라는 제의를 했다.
간호사였던 부인 신숙자 씨는 월북하자는 오씨의 말에 ‘당신은 언젠가 월북 때문에 자신의 눈을 찌르며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1985년 12월 두 딸과 부인을 데리고 북한으로 갔다.
오씨 일가족은 3개월간 외부와 차단된 채 ‘세뇌교육’을 받았으며 오 씨는 1986년 6월부터 11월까지 북한이, 남한 내에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한 한민전 산하 칠보산 연락소에서 근무했다. 경제학자로의 역할은 전혀 하지 못했다. 오 씨는 1986년 11월 초 ‘독일에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 2명을 유인해 월북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부인 신숙자 씨는 ‘당신 자식과 마누라의 생명만 소중하냐. 유망한 젊은 부부를 데려와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라며 오씨의 멱살을 잡고 뺨을 때렸다.
신씨는 또 ‘우리는 죽어도 그만이다. 하지만 내 딸들이 남을 속여 지옥에 빠뜨리는 파렴치범의 딸이라는 소리를 듣게 할 수는 없다’고 외쳤다. 오 씨는 당시 ‘내 뺨을 때리던 아내의 손길과 떨리는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1986년 11월 오씨는 간염에다 심근경색, 동맥경화증으로 초췌해진 아내 신숙자 씨와 열감기를 앓던 두 딸을 북한에 남기고 평양을 출발했다. 북한 공작원 두 명도 따라붙었다. 11월 21일 오씨는 덴마크 코펜하겐 카스트로트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공항 직원에게 구조 요청 메모를 전달해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오 씨는 그 후 5년 동안 독일에 거주하면서 윤이상을 만나 북한에 있는 가족을 송환해 달라고 간청했다. 윤이상은 1987년 10월과 1988년 10월 두 차례에 걸쳐 북한에 있는 부인이 쓴 편지를 건네주었다. 1991년 1월엔 아내와 아이들의 육성이 녹음된 테이프 한 개와 가족사진 여섯 장을 주며 “다시 월북하라.”라고 협박했다. 오 씨는 결국 혼자 힘으로는 가족을 송환할 수 없다고 판단해 1992년 4월 독일주재 한국대사관에 자수했다.
오 씨는 1992년 10월 북한의 요덕수용소를 탈출한 안혁, 강철환으로부터 북에 있는 가족의 소식을 듣게 된다. 이들은 “부인 신숙자씨와 두 딸은 요덕수용소 대숙지구에 수용돼 있고, 신씨는 몇 차례 자살을 기도하는 등 산나물을 뜯으며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것이 바로 오씨와 오씨 가족의 지난날 이야기다.
오길남 박사는 이제 7순의 나이로 현재 가장 큰 소망은 아내 신숙자 씨와 사랑하는 딸 혜원과 규원을 만나 잊혀진 26년여 고통의 나날을 벗어나고 싶다고 말한다.
오길남 박사는 지난 9월 11월 자유아시아방송을 방문해 북의 가족에게 영상 편지를 띄웠다.
오길남 박사의 영상편지: 헤원 엄마. 북쪽 당국은 당신이 간염으로 죽었다고 네게 유엔을 통해서 통보해 왔소. 나는 당신이 저 세상으로 갔다고 믿지 않소. 꼭 살아서 만나 보듬겨 앉고 기쁨의 통곡을 울어보기로 하오. 여보! 제발 생명의 끈을 놓치지 말고 힘이 들더라도 버티시오.
혜원아! 규원아! 내 사랑하는 딸들아! 이제 너희들과 평양 동운동 아파트에서 헤어진 지 26년이 되었구나. 그 동안 요덕수용소에 끌려가 죽음의 땅에서 얼마나 수많은 고초를 겪었겠느냐! 아 너희들이 아빠에게 아름다운 음률을 들려주던 바이올린 소리 듣고 싶구나! 혜원아 규원아 왜 너희들이 아빠한테 원망하지 않았겠느냐! 순진무구한 너희들을 북으로 데리고 간 일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었는 지를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이 너희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고 사실은 너희들이 희생이 되었지 않느냐! 그러나 꼭 만나자! 버텨보라! 버텨서 꼭 살아야 한다. 지금 남한에서 뿐 만 아니라 미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캐나다 등 모든 세계 사람들이 너희들의 운명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너희들의 운명에 대해서 우려도 크다. 어린 너희들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 버티고 또 버티고 어떻게든 살아서 그 고난의 시간을 그 고난의 시간을 이겨나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기필코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바란다. 혜원아 규원아 부둥켜 안고 부둥켜 안고 너희 등을 쓰다 들면서 기쁨의 통곡을 하고 싶구나. 아빠가 멀리서 너희들에게 내 진실을 담은 목소리를 전한다. 혜원아 규원아
오길남 박사에게 현재의 실정을 들려달라고 했다.
오길남 박사: 저도 이제 한국에 돌아와서 살게 된 것이 20년 조금 넘겠습니다. 돌아 올 때는 수구초심이라 해서 내 자신이 죽을 땅이 내가 태어난 곳이라 하고 죽기 위해서 한국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 있는 것이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어쩌든 고통이 연속되고 있습니다. 돌아와서도 악몽에 악몽에 시달리고 있지요. 그리도 요덕 수용소 죽음의 산 골짜기에서 울부 짓는 저의 아내 신숙자의 신음 그리고 내딸 혜원 규원의 아빠를 그리워하는 울부짖음 하루도 빠짐없이 들으며 어떻게 된 샘인지 몰라도 구차한 생명을 저는 부지하고 있습니다. 아 그래도 20년간의 악몽이 연속되든 그 결과가 이제 내 사랑하는 가족과 만나 온 몸을 비비면서 울어볼 수 있으면 기쁨의 눈물을 흘려 봤으면 하는 것이 저희 소망입니다.
오길남 박사가 전 세계인들에게 북한에 볼모 된 가족 구출을 위해 힘써 달라고 간절히 부탁한다.
오길남 박사: 저의 목소리를 듣는 우연히 듣게 되는 전 세계인들이여 저 어린 순진무구한 여인들 운명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 주시고 그들이 풀려날 수 있도록 성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 순진무구한 아녀자들 온갖 고초를 겪어왔던 이 세 아녀자와 못난 남편 못난 아버지가 함께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기대해 주세요.
자유아시아방송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북한에 볼모 된 자신의 아내와 딸 구출운동을 펼치는 오길남 박사를 만나봤다. 지금까지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