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한국인] 북버지니아 한인회 황원균 회장 (2) '젊은 사업가의 좌절 없는 삶'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0.04.30
2010.04.30
사진-영원무역 제공
‘비즈니스에 지름길은 없다. 일찍 온 사람은 다들 자리를 잡은 것 같은데..’
그런 조급한 마음에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이민 후배들에게 이 말을 들려주고자 하는 비즈니스맨이 있다. 지름길만 찾아다니다 보면 그 끝이 낭떠러지가 될 수도 있다.
버지니아와 워싱턴 DC, 메릴랜드 등 3곳에서 동양식품 도매업체 원트레이딩과 주류 수입도매업체 영원트레이딩을 경영하는 황원균대표, 도매상들 가운데 비교적 젊은 층에 속해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는 그가 이제껏 걸어온 상도에는 지름길도 그리고 탄탄대로도 아니다. 한발 한발 내 딛어온 길이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미국 워싱턴의 젊은 사업가 ‘영원무역 황원균 회장의 좌절 없는 삶’ 그 현장을 찾아가 본다.
그는 무일푼으로 미국에서 식품 주류 유통업을 일군 장본인이다. 아프리카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단돈 500달러를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와 지금은 탄탄한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황원균 씨가 한국에서 실습생으로 직장을 시작해, 젊은 나이에 무역부 대리가 된다. 그때부터 황원균의 인생은 시작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황원균: 제가 직장 생활은 무교동에 있던 나전모방이라는 섬유 수출입 회사에 실습생으로 나갔다가 일을 잘했는지 취업이 됐습니다. 무역부 인턴에서 시작해 27살 젊은 나이에 무역부 대리가 됐지요. (그 당시 사장님이었던 노준용씨는 노태우 대통령 때 국무총리를 하신 노재봉 씨의 아버지이십니다.)하루는 저를 부르시더니 황군! 무역부 대리는 일본에서는 40이 넘어야만 가능한 것을 자네에게 임명하니 더 열심히 일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또한, 제가 아프리카를 가게 된 동기는 저의 큰 형님이 라이베리아로 처녀 수출을 했습니다. 마땅한 무역 경험자와 책임을 지고 오지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걱정하시다가 저의 집이 5형제인데 5형제 중의 넷째인 저만 결혼을 안 했습니다. 총각에다 무역업에 경험이 있다 보니까 제가 선택되어서 아프리카 오지로 막중한 책임을 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1985년 한 젊은이가 아프리카 서부 대서양 연안 국가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툭하면 쿠데타가 일어나는 어수선한 나라, 28개 부족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 오지, 한국의 한 젊은이가 그곳에 가서 돈을 벌어보겠다며 덤빈 것이다.
황원균: 총각이었고, 젊었기에 가능했고요. 아마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지요. 엄두도 못 냈을 거예요. 실은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에 일광무역이라는 형님회사의 지사로 나가서 한국에서 생산되는 북어와 빨랫비누를 현지에 내다 파는 일을 했습니다. 식품과는 첫 인연이 되었지요. 라이베리아 사람들은 동태 말린 북어를 좋아하는데, 노르웨이에서 들여오던 동태가 끊겨 한국의 동해 명태가 그 자리를 채웠을때 입니다. 또한, 빨랫비누로 목욕을 자주 하세요. 이분들이 팜유 같은 오일을 많이 먹으니까 웬만한 비누 가지고는 제거가 되지 않으니까요. 가보니까 빨래비누로 샤워를 하시더라고요. 제가 아프리카에 가기 전까지는 그 나라의 무역에 관한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현지에 가보니까 쿠데타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됐고, 또 정부가 법을 집행하는 힘이나 시스템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슨 일을 하려면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준비되어 있어야 되는데 전무 상태였고, 사업문화도 너무 달랐습니다. 제가 가기 전에 한국의 코트라도 있었고 금호타이어도 있었는데, 이런 기업들이 모두 철수하고 유일하게 남은 국내 지ㆍ상사는 일광 무역 저희 무역회사 하나뿐이었습니다. 거기서 자리 잡고 어려운 고비를 한 1년 넘기다 보니까 모든 것이 시스템에 맞질 못했고, 몰랐던 것도 많았고 또한 한국이 그 당시 개발도상국이었지만 한국보다 한 30여 년 이상 차이가 나 모든 일이 어려워서 결과적으로 저희가 지사를 철수하게 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었죠.
황원균 씨가 아프리카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황원균: 아프리카는 크게 불어와 영어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1980년대 초 그 나라에 도착해 보니까 딱 느껴지는 것이 일단은 북한 공관이 있고, 물론 남한공관도 있지만, 다른 공산국가들이 거기에 같이 있었어요. 그래서 중국을 옛날에 중공이라고 했지요. 공산국가들과 대치하고 있다 보니까 모든 행동이나 사업하는데 조심해야 했습니다. 특히 공항에 도착해서 형님 회사 관계가 있던 외교부 직원과 사업 파트너 사람들이 공항에 마중나와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중국 인공기가 보이곤 하니까. 그 순간부터 많이 긴장을 했지요. 왜냐면 여기서 만약 잘못하면 납북도 될 수 있다. 이런 생각도 하게 됐고, 유일하게 한국에서 나가 있는 지 상사의 요원이다 보니까 어려운 점도 있었고 그래서 한시라도 긴장을 놓고 사업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리고 특히 다른 지역으로 갈 때는 아는 한 두 사람에게라도 이야기를 하고 갔었고요. 또 어려웠던 점은 그 나라도 후진국이다 보니까 아무리 좋은 호텔이라고 해도 호텔시설이 열악해서 어떤 때는 밤에 잠을 못 자요. 왜냐면 자는 순간에 뭐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 커다란 도마뱀이 머리맡에 있을 때도 있고 한국하고 시차가 있어서 전화가 오면 전화기가 FRONT DESK(호텔 접수대)딱 한대밖에 없어 3층에도 객실 안내원이 전화 왔다고 올라오면 내려가서 전화를 받아야 되고, 저 개발국가이다 보니까 생활의 환경이 열악해서 거기에 적응하기가 무척 어려웠던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날씨가 우기 건기가 있었고요. 날씨가 열대지방의 더운 것 말고도 음식이 첫째 안 맞았고 또한 말라리아에 대한 두려움 등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었죠. 바로 이런 것들이 나에게는 쓴맛이라고 할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지나고 보니까 어떻게 보면 어려웠지만, 추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6년 1월 그는 돈을 벌 수 있다는 말 한마디만 믿고 또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의 손에는 아프리카에서 마지막 남은 물건을 정리한 돈 500달러만 쥐어져 있었다. 그가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황원균: 실은 미국에 오려고 할 때 500달러도 없었어요. 당시 사업이 망해서 돈이 한푼도 없었는데 그때 한국에서 액세서리를 가지고 갔는데 아프리카 사람들이 액세서리를 좋아하더라고요. 그걸 팔아서 쥔 돈이 500달러였어요. 그 돈을 갖고 미국에 오게 됐는데, 제가 미국에 오게 된 동기는 1986년 초 필라델피아에 살던 형님 친구가 중국으로 무역하면서 친구 동생인 저를 불렀고 잠시 필라델피아 생활을 거쳐, 친구의 권유로 워싱턴으로 옮겨 메릴랜드 콜롬비아에 있는 동양식품 도매상에서 3년간 일한 뒤 우연한 기회에 거래하던 한 식품점에서 제가 나이가 젊고 영어를 하니까 RETAIL, 즉 소매 사업을 해보지 않겠느냐! 돈은 나중에 갚고 해 보라고 해서 했는데, 돈이라는 게 나중에 갚는다는 게 어려워서 부인의 CREDIT(신용)으로 은행에서 한 3만 달러를 빌렸어요. 그 돈으로 RETAIL(소매) 사업을 시작했죠. 그때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당시 한인 상인들이 꽤 있던 프린스 조지 카운티의 슈틀랜드에 차린 ORIENTAL(동양) 마트에서 저는 소비자의 취향, 가격등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또 일본 식품에도 정통하게 됐지요. 이 리테일 경험이 뒷 날 근 힘이 됐다고 봅니다.
3년여를 노력한 끝에 황원균의 미국 도약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가 실행한 것은 다름 아닌 새벽을 여는 것이다.
황원균: 제 이름 원균에서 원을 따서 원트레이딩 이라는 상호로 1992년 워싱턴DC 플로리다 마켓에서 도매상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품목은 동약식품 으로서 수퍼마켓, 한식, 일식식당, 캐리 아웃을 주고객으로 출발했고요. 저희가 문을 여는 시간이 7시인데 저는 새벽 5시 전에 기상해서 일을 시작해 오후에는 한 차 싣고 나가서 혼자서 다 배달을 하고 집에 들어가면 밤 9시 10시까지 일하면서 뛰어다녔지요. 그러다 보니까 미국인들 보다는 더 많이 일을 해야 되고 더 부지런해야 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고요. 그렇게 노력한 결과 사업이 점점 확대되었고. 나중에는 종류가 3천여 가지 정도로 사업범위가 매우 넓어졌습니다.
1996년. 황 씨는 또 한 번의 사업을 확장할 기회를 잡았다. 한국의 농협 등으로부터 주류판매업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은 것이다.
황원균: 저는 농협에서 취급하던 안동 소주, 배로와인, 이로주 라는 세 가지 주류를 가지고 미국에 통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수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하다보 너무 지식이 없으니까 한 3년 되니까 술 비즈니스가 LICENSE(면허) 피가 높으며 경비는 많이 나가고 수입은 없는 겁니다. 한 3년 동안 40여만 달러 손해을 보다 보니까 사업을 못 하겠다 해서 접으려고 했지요. 그런데 운이 좋았던 게 일본의 7대 기업 중의 하나인 하구시까 사케를 이 지역에서 팔아달라는 것과 한국의 그린소주와 OB 맥주의 판권을 받기로 했어요. 그게 실패했던 과정에서 다시 도전하고 다시 사업을 이끌 수 있는 계기가 됐었지요. 그리고 미국분들은 술을 너무 강하거나 너무 독한 술을 잘 먹을 거로 생각했지만 실은 그 반대예요. 강한 술은 아주 더 강해야 되고, 부드러운 술은 더욱 부드러워야 되는데 저희가 처음 그것에 부응하지 못해 실패했지요. 결과적으로 미국분들은 어떤 건강보다는 본인들의 여유로움과 즐거움, 또한 맛과 향을 즐긴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황원균씨는 한국의 막걸리 보급에도 힘을 쏘았다.
황원균: 작년에 한국에 나가니까 막걸리가 한국에서 유행하더라고요. 그전에도, 저는 한 3-4년 전부터 막걸리를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그게 잘 팔리지 않았는데 작년 10월부터 한국에서 유행과 동시에 이쪽에도 유행되기 시작하더라고요. 올해는 벌써 몇 년 안됐는데도 막걸리가 많이 나가요. 그런데 저희는 막걸리를 지금은 니고리 사케(Nigori sake)라는 말을 덜 쓰는데 그 당시는 처음의 자리 잡기 위해 3년 전에는 막걸리 하면 미국사람들이 못 알아들으니까 막걸리와 코리안 니고리 사케라는 것을 병행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막걸리가 미국에서 많이 자리 잡고 미국인들도 좋아하고 특히 요즈음은 생막걸리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생막걸리를 더 좋아해요.
황원균 씨에게 성공 비결을 물었다. 그는 부지런함을 이야기한다.
황원균: 비결은 아주 쉬운 것 같아요. 멀리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꾸준히 한길로만 걸어왔고요. 또 운도 좋아 저의 전공인 무역업과 유사한 유통업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하고, 부지런한 것이 비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사업을 시작하고 새벽 5시 이후에 일어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미국에서의 사업은 미국 사람과 똑같이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그들보다 더 부지런히 더 많이 움직여야 하며, 또한 신용이라는 것이 100% 중요합니다. 그리고 미국은 법이 중요합니다. 미국의 RULE(규정)을 지켜야 하고 미국인보다 한발 앞서 움직여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는 과정에서 이민자들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황원균 씨는 북버지니아 한인회장 말고도 다른 봉사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황원균: 2006년도에 워싱턴 DC하고 서울시와 자매결연을 맺었습니다. 그 당시 현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이었고 워싱톤 DC는 앤터니 윌리엄 시장이었는데 제가 자매 결연하는데 미국 대표 자격으로 윌리엄 시장 부부하고 시장 디렉터와 함께 한국을 나가 봉사했으며, 지금도 자매결연에 관해 일하고 있습니다. 또한, 4년전에 제14회 샌프란시스코 미주체전의 워싱턴 팀 단장을 한 것과 워싱턴 민주평통 부회장과 위원으로 8년간 일했지요.
황원균 씨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몰다바에서 와인을 수입해서 먹었다는 이야기를 생각하며, 몰다바에서 와인을 생산해 판매하는 전략도 세우고 있다.
황원균: 저희가 이번에 몰다바 이스턴 유럽에 와인을 개발해 인허가 과정만 남아 있습니다. 개발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습니다.
황원균 씨가 세계 한인들에게 들려 주는 충언이다.
황원균: 제가 경험한 이야기인데 ‘미국은 저에게 기회를 주었고 저는 최선을 다했으며. 또 미국은 그 결과를 주었습니다’. 최선을 다한 저는 그 결과도 받았고, 가능한 선에서 미국에 환원도 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성공 비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한, 세계에 계시는 한인 동포분들도 각기 속한 나라에서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선이라는 것은 즉 성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미국 워싱턴의 젊은 사업가 ‘영원무역 황원균 회장의 좌절 없는 삶’ 그 현장을 찾아가 봤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버지니아와 워싱턴 DC, 메릴랜드 등 3곳에서 동양식품 도매업체 원트레이딩과 주류 수입도매업체 영원트레이딩을 경영하는 황원균대표, 도매상들 가운데 비교적 젊은 층에 속해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는 그가 이제껏 걸어온 상도에는 지름길도 그리고 탄탄대로도 아니다. 한발 한발 내 딛어온 길이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미국 워싱턴의 젊은 사업가 ‘영원무역 황원균 회장의 좌절 없는 삶’ 그 현장을 찾아가 본다.
그는 무일푼으로 미국에서 식품 주류 유통업을 일군 장본인이다. 아프리카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단돈 500달러를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와 지금은 탄탄한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황원균 씨가 한국에서 실습생으로 직장을 시작해, 젊은 나이에 무역부 대리가 된다. 그때부터 황원균의 인생은 시작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황원균: 제가 직장 생활은 무교동에 있던 나전모방이라는 섬유 수출입 회사에 실습생으로 나갔다가 일을 잘했는지 취업이 됐습니다. 무역부 인턴에서 시작해 27살 젊은 나이에 무역부 대리가 됐지요. (그 당시 사장님이었던 노준용씨는 노태우 대통령 때 국무총리를 하신 노재봉 씨의 아버지이십니다.)하루는 저를 부르시더니 황군! 무역부 대리는 일본에서는 40이 넘어야만 가능한 것을 자네에게 임명하니 더 열심히 일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또한, 제가 아프리카를 가게 된 동기는 저의 큰 형님이 라이베리아로 처녀 수출을 했습니다. 마땅한 무역 경험자와 책임을 지고 오지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걱정하시다가 저의 집이 5형제인데 5형제 중의 넷째인 저만 결혼을 안 했습니다. 총각에다 무역업에 경험이 있다 보니까 제가 선택되어서 아프리카 오지로 막중한 책임을 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1985년 한 젊은이가 아프리카 서부 대서양 연안 국가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툭하면 쿠데타가 일어나는 어수선한 나라, 28개 부족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 오지, 한국의 한 젊은이가 그곳에 가서 돈을 벌어보겠다며 덤빈 것이다.
황원균: 총각이었고, 젊었기에 가능했고요. 아마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지요. 엄두도 못 냈을 거예요. 실은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에 일광무역이라는 형님회사의 지사로 나가서 한국에서 생산되는 북어와 빨랫비누를 현지에 내다 파는 일을 했습니다. 식품과는 첫 인연이 되었지요. 라이베리아 사람들은 동태 말린 북어를 좋아하는데, 노르웨이에서 들여오던 동태가 끊겨 한국의 동해 명태가 그 자리를 채웠을때 입니다. 또한, 빨랫비누로 목욕을 자주 하세요. 이분들이 팜유 같은 오일을 많이 먹으니까 웬만한 비누 가지고는 제거가 되지 않으니까요. 가보니까 빨래비누로 샤워를 하시더라고요. 제가 아프리카에 가기 전까지는 그 나라의 무역에 관한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현지에 가보니까 쿠데타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됐고, 또 정부가 법을 집행하는 힘이나 시스템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슨 일을 하려면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준비되어 있어야 되는데 전무 상태였고, 사업문화도 너무 달랐습니다. 제가 가기 전에 한국의 코트라도 있었고 금호타이어도 있었는데, 이런 기업들이 모두 철수하고 유일하게 남은 국내 지ㆍ상사는 일광 무역 저희 무역회사 하나뿐이었습니다. 거기서 자리 잡고 어려운 고비를 한 1년 넘기다 보니까 모든 것이 시스템에 맞질 못했고, 몰랐던 것도 많았고 또한 한국이 그 당시 개발도상국이었지만 한국보다 한 30여 년 이상 차이가 나 모든 일이 어려워서 결과적으로 저희가 지사를 철수하게 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었죠.
황원균 씨가 아프리카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황원균: 아프리카는 크게 불어와 영어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1980년대 초 그 나라에 도착해 보니까 딱 느껴지는 것이 일단은 북한 공관이 있고, 물론 남한공관도 있지만, 다른 공산국가들이 거기에 같이 있었어요. 그래서 중국을 옛날에 중공이라고 했지요. 공산국가들과 대치하고 있다 보니까 모든 행동이나 사업하는데 조심해야 했습니다. 특히 공항에 도착해서 형님 회사 관계가 있던 외교부 직원과 사업 파트너 사람들이 공항에 마중나와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중국 인공기가 보이곤 하니까. 그 순간부터 많이 긴장을 했지요. 왜냐면 여기서 만약 잘못하면 납북도 될 수 있다. 이런 생각도 하게 됐고, 유일하게 한국에서 나가 있는 지 상사의 요원이다 보니까 어려운 점도 있었고 그래서 한시라도 긴장을 놓고 사업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리고 특히 다른 지역으로 갈 때는 아는 한 두 사람에게라도 이야기를 하고 갔었고요. 또 어려웠던 점은 그 나라도 후진국이다 보니까 아무리 좋은 호텔이라고 해도 호텔시설이 열악해서 어떤 때는 밤에 잠을 못 자요. 왜냐면 자는 순간에 뭐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 커다란 도마뱀이 머리맡에 있을 때도 있고 한국하고 시차가 있어서 전화가 오면 전화기가 FRONT DESK(호텔 접수대)딱 한대밖에 없어 3층에도 객실 안내원이 전화 왔다고 올라오면 내려가서 전화를 받아야 되고, 저 개발국가이다 보니까 생활의 환경이 열악해서 거기에 적응하기가 무척 어려웠던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날씨가 우기 건기가 있었고요. 날씨가 열대지방의 더운 것 말고도 음식이 첫째 안 맞았고 또한 말라리아에 대한 두려움 등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었죠. 바로 이런 것들이 나에게는 쓴맛이라고 할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지나고 보니까 어떻게 보면 어려웠지만, 추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6년 1월 그는 돈을 벌 수 있다는 말 한마디만 믿고 또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의 손에는 아프리카에서 마지막 남은 물건을 정리한 돈 500달러만 쥐어져 있었다. 그가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황원균: 실은 미국에 오려고 할 때 500달러도 없었어요. 당시 사업이 망해서 돈이 한푼도 없었는데 그때 한국에서 액세서리를 가지고 갔는데 아프리카 사람들이 액세서리를 좋아하더라고요. 그걸 팔아서 쥔 돈이 500달러였어요. 그 돈을 갖고 미국에 오게 됐는데, 제가 미국에 오게 된 동기는 1986년 초 필라델피아에 살던 형님 친구가 중국으로 무역하면서 친구 동생인 저를 불렀고 잠시 필라델피아 생활을 거쳐, 친구의 권유로 워싱턴으로 옮겨 메릴랜드 콜롬비아에 있는 동양식품 도매상에서 3년간 일한 뒤 우연한 기회에 거래하던 한 식품점에서 제가 나이가 젊고 영어를 하니까 RETAIL, 즉 소매 사업을 해보지 않겠느냐! 돈은 나중에 갚고 해 보라고 해서 했는데, 돈이라는 게 나중에 갚는다는 게 어려워서 부인의 CREDIT(신용)으로 은행에서 한 3만 달러를 빌렸어요. 그 돈으로 RETAIL(소매) 사업을 시작했죠. 그때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당시 한인 상인들이 꽤 있던 프린스 조지 카운티의 슈틀랜드에 차린 ORIENTAL(동양) 마트에서 저는 소비자의 취향, 가격등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또 일본 식품에도 정통하게 됐지요. 이 리테일 경험이 뒷 날 근 힘이 됐다고 봅니다.
3년여를 노력한 끝에 황원균의 미국 도약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가 실행한 것은 다름 아닌 새벽을 여는 것이다.
황원균: 제 이름 원균에서 원을 따서 원트레이딩 이라는 상호로 1992년 워싱턴DC 플로리다 마켓에서 도매상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품목은 동약식품 으로서 수퍼마켓, 한식, 일식식당, 캐리 아웃을 주고객으로 출발했고요. 저희가 문을 여는 시간이 7시인데 저는 새벽 5시 전에 기상해서 일을 시작해 오후에는 한 차 싣고 나가서 혼자서 다 배달을 하고 집에 들어가면 밤 9시 10시까지 일하면서 뛰어다녔지요. 그러다 보니까 미국인들 보다는 더 많이 일을 해야 되고 더 부지런해야 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고요. 그렇게 노력한 결과 사업이 점점 확대되었고. 나중에는 종류가 3천여 가지 정도로 사업범위가 매우 넓어졌습니다.
1996년. 황 씨는 또 한 번의 사업을 확장할 기회를 잡았다. 한국의 농협 등으로부터 주류판매업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은 것이다.
황원균: 저는 농협에서 취급하던 안동 소주, 배로와인, 이로주 라는 세 가지 주류를 가지고 미국에 통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수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하다보 너무 지식이 없으니까 한 3년 되니까 술 비즈니스가 LICENSE(면허) 피가 높으며 경비는 많이 나가고 수입은 없는 겁니다. 한 3년 동안 40여만 달러 손해을 보다 보니까 사업을 못 하겠다 해서 접으려고 했지요. 그런데 운이 좋았던 게 일본의 7대 기업 중의 하나인 하구시까 사케를 이 지역에서 팔아달라는 것과 한국의 그린소주와 OB 맥주의 판권을 받기로 했어요. 그게 실패했던 과정에서 다시 도전하고 다시 사업을 이끌 수 있는 계기가 됐었지요. 그리고 미국분들은 술을 너무 강하거나 너무 독한 술을 잘 먹을 거로 생각했지만 실은 그 반대예요. 강한 술은 아주 더 강해야 되고, 부드러운 술은 더욱 부드러워야 되는데 저희가 처음 그것에 부응하지 못해 실패했지요. 결과적으로 미국분들은 어떤 건강보다는 본인들의 여유로움과 즐거움, 또한 맛과 향을 즐긴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황원균씨는 한국의 막걸리 보급에도 힘을 쏘았다.
황원균: 작년에 한국에 나가니까 막걸리가 한국에서 유행하더라고요. 그전에도, 저는 한 3-4년 전부터 막걸리를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그게 잘 팔리지 않았는데 작년 10월부터 한국에서 유행과 동시에 이쪽에도 유행되기 시작하더라고요. 올해는 벌써 몇 년 안됐는데도 막걸리가 많이 나가요. 그런데 저희는 막걸리를 지금은 니고리 사케(Nigori sake)라는 말을 덜 쓰는데 그 당시는 처음의 자리 잡기 위해 3년 전에는 막걸리 하면 미국사람들이 못 알아들으니까 막걸리와 코리안 니고리 사케라는 것을 병행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막걸리가 미국에서 많이 자리 잡고 미국인들도 좋아하고 특히 요즈음은 생막걸리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생막걸리를 더 좋아해요.
황원균 씨에게 성공 비결을 물었다. 그는 부지런함을 이야기한다.
황원균: 비결은 아주 쉬운 것 같아요. 멀리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꾸준히 한길로만 걸어왔고요. 또 운도 좋아 저의 전공인 무역업과 유사한 유통업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하고, 부지런한 것이 비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사업을 시작하고 새벽 5시 이후에 일어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미국에서의 사업은 미국 사람과 똑같이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그들보다 더 부지런히 더 많이 움직여야 하며, 또한 신용이라는 것이 100% 중요합니다. 그리고 미국은 법이 중요합니다. 미국의 RULE(규정)을 지켜야 하고 미국인보다 한발 앞서 움직여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는 과정에서 이민자들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황원균 씨는 북버지니아 한인회장 말고도 다른 봉사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황원균: 2006년도에 워싱턴 DC하고 서울시와 자매결연을 맺었습니다. 그 당시 현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이었고 워싱톤 DC는 앤터니 윌리엄 시장이었는데 제가 자매 결연하는데 미국 대표 자격으로 윌리엄 시장 부부하고 시장 디렉터와 함께 한국을 나가 봉사했으며, 지금도 자매결연에 관해 일하고 있습니다. 또한, 4년전에 제14회 샌프란시스코 미주체전의 워싱턴 팀 단장을 한 것과 워싱턴 민주평통 부회장과 위원으로 8년간 일했지요.
황원균 씨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몰다바에서 와인을 수입해서 먹었다는 이야기를 생각하며, 몰다바에서 와인을 생산해 판매하는 전략도 세우고 있다.
황원균: 저희가 이번에 몰다바 이스턴 유럽에 와인을 개발해 인허가 과정만 남아 있습니다. 개발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습니다.
황원균 씨가 세계 한인들에게 들려 주는 충언이다.
황원균: 제가 경험한 이야기인데 ‘미국은 저에게 기회를 주었고 저는 최선을 다했으며. 또 미국은 그 결과를 주었습니다’. 최선을 다한 저는 그 결과도 받았고, 가능한 선에서 미국에 환원도 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성공 비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한, 세계에 계시는 한인 동포분들도 각기 속한 나라에서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선이라는 것은 즉 성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미국 워싱턴의 젊은 사업가 ‘영원무역 황원균 회장의 좌절 없는 삶’ 그 현장을 찾아가 봤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