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이야기: 가족 상봉을 돈벌이로 이용하는 북한이 원망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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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이수경 lees@rfa.org

오늘은 미국에 살고 있는 올해 86살의 허 동호씨의 얘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허 동호씨는 한국전쟁 당시 헤어진 가족들을 1990년대 들어 여러 차례 상봉하며 교류를 나눴습니다. 그러나 이산가족의 상봉을 돈벌이로 이용하는 북한 당국의 태도 때문에 안타깝지만 더 이상 가족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허동호씨의 고향은 북한입니다. 그는 혹시 북한에 살고 있는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자세한 지명은 밝히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1.4후퇴 때 혼자 남쪽으로 피난 온 허씨는 3.8선이 그어지고 가족들과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의 처가 지금 이북에 살고 있습니다. 거기 우리 딸도 있고 우리 아들도 있어요. 그 당시에 한 2-3일 있다가 다시 들어갈 생각하고 피난 나왔다가 지금 영영 미국까지 와서 살고 있습니다. 그 때는 전쟁이 났기 때문에 가족이 못나오고 그냥 나 혼자만 나왔어요.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딱 막혀서 못 갔습니다."

서울에서 보따리 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던 허씨는 오직 돈을 벌 생각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전쟁에서 번 돈을 가지고 아메리칸 드림, 즉 미국에서의 성공을 꿈꾸며 비행기를 탔습니다. 낯선 나라에서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달랐지만 어차피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 으로써 어디서 살건 허 씨에게는 타향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식당일서부터 세탁소 건축 일까지 허 씨는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던지 했습니다. 혹시라도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되면 자랑스러운 아빠 떳떳한 가장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야 뭐 여기서 안 해 본 것 없죠 뭐. 고생했다고 봐야지. 미국에는 온지가 벌써 30-40년 됩니다. 서울에 있었을 적에 월남을 갔었는데 월남 갔다가 74년도에 나와서 한국에서 바로 미국으로 갔지요. 혼자 살다가 또 장가를 가서 아들 딸 낳고서 살고 있지요. "

미국에서 결혼한 아내와 함께 허씨는 미국에서 새 삶을 찾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이제 좀 살만해 졌나 싶었는데 갑자기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다시 혼자가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더욱 간절해 진 것이 고향 생각이었습니다. 고향에 두고 온 아내는 건강한지, 어린 자식들은 어떻게 컸는지 날마다 그리움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는 생각 끝에 북한 당국에 편지를 썼습니다. 가족을 만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내가 편지를 보냈다구요. 이북의 평양에 해외 동포 위원회에 편지를 직접 보냈습니다. 내 가족이 어디서 살고 있었는데 나도 거기서 살았다. 만나고 싶다. 그랬더니 한 3년 후에 소식이 왔어요. 나는 그동안 잊고 있었는데. 너희 가족이 어디 어디 있으니까 네가 만나고 싶으면 우리가 초청장을 보내주겠다. 그래서 초청장이 왔어요. 그래서 내가 북한에 들어갔어요."

그 편지 한 장 덕분에 가족을 만난 허 동호씨는 고향집에서 꿈만 같은 한 달을 보냈습니다. 가족들은 40년 만에 돌아온 가장에게 왜 이제야 왔냐는 원망보다, 살아 있어서 고맙다며 기뻐했습니다.

"잘 사는 형편은 아니었지만 우선 다 살아있고 처도 살아있고 아들 딸 다 살아있으니까. 원망이요? 안하죠. 내가 찾아 준 것 만으로도 고맙죠. (아내가) 잃었던 남편을 찾았는데 죽었는지 알고 없는 줄 알고 살았는데 내가 살아서 만나겠다고 하니까 나머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내가 가족을 찾으니까 이북에서 내 가족들에 대하 대우가 달라졌어요."

이후 허씨는 5차례 더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그때마다 편지를 하고 초청장을 받고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하는 등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남들은 고향 소식 한번 듣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번거로움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북한을 방문하지 않을 때는 가족들에게 정기적으로 돈도 보냅니다. 그리 큰 액수는 보내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한번에 200-300 달러. 그나마 가족들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허씨는 사실 더 많은 돈을 보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돈이 직접 전달되지 않는 북한의 송금 체제 때문에 그러지도 못한다고 말합니다.

"100불 보내준다고 하면 50불은 지금 주지만 50불은 6개월 후에 줍니다. 그런 식으로 돈을 한꺼번에 주지 않아요. 그러니까 많이 안 보내주고 그저 조금씩 보내요. 지난 금요일 날 내가 또 보냈다구요. 우리 손자가 장가를 간다고 해서 옷도 사서 보내주고. "

왜 요즘에는 고향에 가지 않으시냐는 질문에 허 씨는 한숨부터 지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을 돈벌이로만 이용하는 북한 당국의 태도 때문에 이제는 고향에 가기가 싫어졌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갈려고 하면 오늘이라도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를 가야 가족들은 하루 밤 아니면 이틀 밤밖에 못 봐요. 집에도 못가보고 내가 평양에 머물다가 호텔 같은 데서 가족을 만나고 그 다음부터는 구경만 시켜줘요. 백두산, 묘향산, 김일성 생가로 구경만 시켜줘요. 내가 거기 한 열흘 있으면 아흐레는 구경만 하고 하루 딱 가족을 만나게 해 줘요. 그것도 돌아오기 전날. 그래서 안가요. 그러니까 돈만 없애고 내가 지금 돈벌이도 못하고 있는데 거기 갔다 오려면 7-8천 불 없어지는데 그러니까 내가 가지를 않죠."

허씨는 이제 고향은 갈 수 없어서 못가는 곳이 아니라 갈 수 있어도 안가는 곳이 되어 버렸다고 안타까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