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이야기: 올해 76살의 실향민 김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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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이수경

오늘은 미국 메릴랜드 주에 살고 있는 평안남도 안주가 고향인 올해 76살의 실향민 김창재씨의 얘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먼저 고향이 어디신가요?

평남 안주

고향을 떠나신 것은 언제인가요?

저는 625 전에 해방 직후에 월남했습니다.

그때 어떤 사유로 이남에 오시게 됐나요?

그때 공산치하가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 신앙관계와 많은 자유를 갈망해서 월남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신앙인이셨나요?

네 기독교. 많이 고통 받지는 않았지만 예상을 해서 나온 것이죠.

당시 나이가 어떻게 되셨나요?

제 나이가 14살

그럼 고향에 대한 기억이 생생 하시겠어요

그럼요. 옛날에 살던 모습과 건물등 어느 정도 변했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당시 놀던 친구들과 장소가 얼마나 변했는지.. 상상 하건데 낙후된 생활과 비참한 생활일 것으로 상상합니다. 특별히 종교의 자유가 없고 세계에서 가장 악질적인 독재 하에 있는 것 아닙니까?

사실 옛날만 해도 고향을 떠난 다는 것이 쉽지 않는 일이지 않았습니까?

아주 큰일이었죠. 그 당시에는 떠난 다는 것이 고향의 모든 재산을 놓고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비참했죠.

14살이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부모님을 따라 나오신 것인데 좀 섭섭하지 않으셨나요?

그때는 부모님을 의지해서 나왔기 때문에 섭섭한 것은 없었어요. 그 당시에는 분위기와 아는 사람들과 친척과 모든 대다수의 국민이 떠나야 한다는 분위기를 알고 있었죠.

그 때만 해도 남으로 오기가 수월했나 봐요.

그 당시에는 3.8선이였는데 경계가 철저하지 못했어요.

남한으로 오셔서는 어디에 정착을 하셨나요?

어디에 정착 했다기 보다는 일반적으로 북에서 온 사람들은 친척이 있는 사람들은 친척집에 의지도 했고 친척이 없는 사람들은 서울이나 남한에 와서 몸 붙이기가 힘들었습니다. 돈은 없고 재산도 없고 맞벌이부터 시작해서 서울에 동대문 시장, 청계천 평화 시장이 피난 온 사람이 처음 시작하는 삶터였습니다.

그러면 연고가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집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남한에서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되고 정착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셨나요?

6.25때까지 3-4년.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다시 고향에 못 간다는 생각은 안하셨죠?

네 그때는 곧 올라간다. 곧 통일 된다 정치 상황이나 군사상황을 관망하면서 희망이 있었는데 6.25 전쟁 때문에 모든 상황이 급변하고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우린 또 6.25가 날 때 참전했습니다.

그럼 6.25 참전을 하셨었어요?

네. 저는 포병으로 있었습니다. 북한에 대한 적개심도 있었고 또 갑자기 거처할 때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그래서 군대 간 사람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사실 인민군은 몇 년 전만해도 같이 학교를 다녔을 수도 있는 고향친구일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고. 지금 용산 전쟁 박물관에 가면 남한의 형하고 북한 인민군의 친동생이 만나는 동상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이 실화입니다. 전쟁을 하면서 친척도 만나고 동생도 만나고.

비극적인 일입니다.

세상이 그런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 동족끼리 싸우기 때문에 비참하죠.

만약 고향을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러 계셨다면 지금 어떤 생활을 하고 계실지 상상해 보셨습니까?

우리는 미국에 와서 2-30년 살았는데 이렇게 좋은 환경이 어디 있습니까? 의료시설 식량 이런 거 다 생각하면 살아남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동안에 언젠가 고향에 다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계십니까?

현재로서는 희망을 갖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희망이 없다고 봐야죠. 너무나 비참하게 살기 때문에 체념하는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고향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독재 하에 기독교를 그렇게 핍박하지만 저희 정보에 의하면 어디선가 암암리에 기독교를 유지하면서 나가는 예배 처소와 그 후손들이 많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끝까지 희망을 잃지 말고 통일이 곧 오리라 굳게 믿고 살면 좋겠다 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미국 메릴랜드 주에 살고 있는 올해 76살의 실향민 김창재씨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