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이야기: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박 상원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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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이수경 lees@rfa.org

오늘은 미국 버지니아주에 살고 있는 올해 86살의 박상원씨의 얘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박씨는 1990년 북한에 있는 조강지처와 상봉한 것을 계기로 남쪽에서 재가한 부인과 이혼하는 아픈 사연을 가지고 계십니다. 미국 공군(National Air force)에서 20년 넘게 기술자로 일하던 한인동포 박상원씨는 지난 1990년 은퇴한 이후 쭉 노인 아파트에 거주하며 혼자 살고 있습니다. 박 씨는 하루 종일 전화 한통 걸려오지 않는 빈집에서 외로움과 싸워야 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말합니다.

(박상원) 건강은 그저 괜찮아요. 내가 집안에서 화장실, 부엌 집안일을 운동 삼아 다 하니까 혼자서. 밖에 나가질 못하고 아침이면 집 앞에 20분 동안 걷다 오는 것 밖에 없지. 내가 그 전에 차가 있을 때는 한인회에서 모임이 있으면 꼭 빠지지 않고 다니고 하던 사람인데 이제 나이가 많으니까 운전을 삼가 달라고 편지가 왔어. 그래서 내가 차를 팔았어요. 그리고서는 지금 집안에 처박혀 있다고.

박상원씨의 가족들은 모두 북한에 있습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 박씨는 고향인 황해도 연백에서 조강지처인 아내와 아들 둘 딸 하나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박 씨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인민군 징집을 피해서 잠깐 남쪽으로 피난 간다고 고향을 떠난 것이 영원히 가족과 헤어지는 계기가 될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곧 3.8선이 그어졌고, 박 씨는 매일 밤 술 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야만 했습니다.

(박상원) 말할 수 없었지. 매일 저녁에 혼자서 울기만 하고 술로 달랬었지. 그 얘기를 다 하자면 밤을 세도 모자라 (그 후 서울에서 혼자 사셨나요?) 서울에서 혼자 공부해서 국가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서 합격을 했어. 그래서 공무원 생활 30년 하다가 여기에 왔어. 공무원 생활 하면서 누가 중매를 해서 결혼해서 살았었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박씨는 서서히 남한 생활에 적응했습니다. 남한에서 만난 아내 사이에서 자식도 둘을 더 낳았습니다. 그 후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왔고 미국에서도 안정된 직장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박씨는 1990년 캐나다 동포의 도움으로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됩니다.

(박상원) 벌써 고향 갔다 온지가 17년째 되는데, 이북 정부에서는 차 한 대를 내주었고 안내자가 있어서 여기저기 구경시켜주고 그랬지.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셨나요?) 만나서는 처음에 일주일이면 돌아오니까 일주일만 피하려고 나갔는데 영영 이렇게 될지는 몰랐다. 미안하다고 그랬더니 마누라가 속이 넓어서 세월이 그런 것을 괜찮다고 서로가 고생 많이 했다고 하더군.

이른바 '해외동포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한 박씨는 40년 만에 만난 조강지처와 자식들 그리고 12명이나 되는 손자손녀들과 함께 한 달이라는 달콤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박상원) 40년이 지나서 둘이 만났으니 저녁에 잘 적에 둘이서 자는데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마누라랑 하는데 마누라가 자꾸 이불을 뒤집어 덮는 거야. 그런데 숨이 막혀서 죽겠어. 그래서 왜 자꾸 이불을 뒤집어 씌우냐고 했더니 밖에서 혹시 누가 들이면 큰일 난다고 하면서 그 때부터 고생한 얘기부터 하는데 밤 세도록 얘기해도 모자랐어. 한 달을 같이 있었는데 한 달을 얘기해도 다 못하고 왔어.

그러나 박상원씨의 행복은 그렇게 한 달로 끝났습니다. 박씨가 고향방문을 마치고 미국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남한에서 만나 그때까지 함께 살던 아내와의 불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박상원) 이북에 갔다가 와서는 마누라가 심술을 부리고 그러는데 40년이 지나서 마누라 만나고 왔다고 별 소리를 다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수년간 데리고 살았지만 인간이 못 쓰겠구나 그래서 내가 차버렸어 (헤어지셨어요?) 그럼 내가 차서 지금 서울에 나가서 사는데 서울에 어디 가서 사는지도 모르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라.

결국 박씨는 가족 상봉을 계기로 아내와 이혼하고 자식들과도 연락을 끊은 채 혼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북한의 가족들을 다시 마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남쪽에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박씨는 혼자가 된 것입니다.

(박상원) (북한의 가족들과) 연락을 한 3년간 편지가 주고받고 했는데 편지 끊어 진지가 10년도 더 되었어 소식이 안와. 그놈의 나라에는 전화도 없고 편지도 없어. 나이가 이렇게 많으니까 죽기 전에 내가 한번 고향에 갔다 왔으면 좋겠는데 그게 소용이 있나 가고 싶어도 못가지.

이제 박씨의 소원은 가족의 소식 한번만 더 듣는 것입니다. 늙은 아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지, 자식들은 굶지 않고 잘 사는지. 죽기 전에 한번만 가족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말합니다.

(박상원) 내가 북한에 갔을 때에는 그래도 배급이 있어서 식구들이 먹고 지냈는데 내가 갔다 와서 3년이 지나서는 배급도 끊겼다고 하고, 그래도 풀뿌리라도 먹고 사는지 죽었는지 마누라가 나보다 2살 더 많은데 마누라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소식이 끊어져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내가 여기서 홀로 외로이 있으니까 생각나는 것은 그저 드러누워서 천장만 쳐다보면 이북 생각이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