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수경
다음은 이산가족 이야기 시간입니다. 오늘은 평양이 고향인 올해 80세의 진경성 할아버지의 사연을 들어보겠습니다. 진경성 할아버지는 고향의 형제들을 만나고 싶어서 이산가족 1차 상봉때 부터 신청을 했지만 올해로 15차례 상봉 추첨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언제 남한으로 내려 오셨나요?
1.4 후퇴 전이니까 49년경에 서울에 왔습니다. 그러니까 나는6.25 사변이 나기 전에 서울에 와 있었고 사변이 나는 통에 오고 가고 못해서 이산가족이 되었습니다.
혼자서 남한에 오셨나요?
아니요 그때 형제가 왔어요, 동생하고 둘이서
그 후에 6.25 전쟁이 나서 그 다음에 소식이 끊긴 거네요. 그때 서울에는 어떤 일로 먼저 와 계셨나요?
공부하러 왔었죠.
전쟁 중에는 전혀 연락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나요?
그렇죠. 전혀 왕래가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통신도 끊기고. 완전히 북과 남이 단절 되었죠
당시 고향에는 누가 계셨나요?
부모님과 남동생 하나 여동생 둘, 그렇게 다섯 식구가 남아 있었죠. 지금 어머님 아버님은 돌아가신 것으로 보고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는데 그것도 생사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 후에 고향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하셨나요? 평양 출신 분들에게 들을 기회도 없었나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제가 작년 4월에 천주교 계통으로 해서 3박 4일 동안 평양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천주교 신자인데 신부님들하고 수녀님들하고 한 70명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고향 땅에 갔는데도 나 살던 동네는 깡그리 없어지고 부모 동생 가족 소식은 전혀 접하지 못했습니다.
기대도 많이 하셨을 텐데요.
기대는 안했습니다. 소식이 끊긴지 57이 되었으니까 기대는 안했습니다. 그냥 고향 산천 느끼고 온 것이죠.
그래도 반세기 만에 가 보시니까 어떠셨나요? 많이 변했던가요?
한마디로 산천만 안 변하고 주위는 완전히 바뀌었어요. 발전했다면 발전했다고 볼 수 있고 전쟁 전에 시가지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어요. 획일적인 건축 양식에 판에 박은 도시 계획, 우리처럼 자유롭게 지은 건축이 아니고 정부에서 짓는 건축이니까 아주 똑같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고향생각 언제 제일 많이 나세요?
명절 때 남들은 추석이나 구정이나 고향에 다 가는데 성묘도 가고 우리 실향민은 그것이 없습니다. 갈래야 갈 수 없는 고향이니까요. 혹시 한국에 와 봤는지 모르는데 임진각에서 망향 제를 합니다. 구정하고 추석 때 그때 거기 가서 참배하고 통일 때 까지 동생들이 살아 있어 달라고 마음 속 으로만 기도하고 있습니다.
동생 분들하고 어릴 적 추억도 많으시죠?
추억은 많지만 자꾸 잊어가고 있습니다. 여동생은 현재 나이가 70정도 되는데 식량난으로 혹시 굶어 죽지나 않았는지 전쟁 때 폭격에 희생되지는 않았는지 답답할 뿐입니다.
북한에 남겨진 동생 분들도 고생 하셨겠지만 부모도 없이 남동생과 둘이 서울에서 고생 많으셨죠?
저는 서울에 외삼촌이 먼저 와 계셨어요. 그래서 괜찮았어요. 외삼촌은 80년도에 돌아 가셨습니다.
남동생 분은요?
2002년도에 남동생도 저보다 먼저 갔습니다.
고향 소식도 들어보지 못하고 남동생이 먼저 돌아가셨네요. 혹시 유언 남기신 것이 있나요?
형님이라도 몸 건강히 있다가 동생들 만나 주세요. 하고 죽었습니다.
2000년부터 매년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고 있는데 신청은 해 보셨나요?
신청은 했는데 15번 떨어졌어요. 이제 16차가 내달인데 다시 추첨한다고 하는데 또 희망을 걸어봅니다. 컴퓨터 추첨을 하는데 신청한 인원수가 13만 명인데 추첨하는데 한번에 200명입니다. 200명 중에 북쪽에 가족이 살아 있고 연락 닿는 사람 100명만 갑니다.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이산가족은 이렇게 많은데 일 년에 몇 백 명만 만난 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저 사람들이 동포애를 발휘해서 다 받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참 답답합니다.
만약에 다음번 이산가족 상봉 때 동생 분들과 만나게 된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아마 서로 확인하기 바쁠 것입니다. 제가 그려보는 동생 모습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요. 우선 만나면 눈물바다가 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