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이야기-황해도 재령이 고향인 심천호(가명)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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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이수경 lees@rfa.org

오늘은 미국에 살고 있는 올해 74살의 심천호씨의 얘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황해도 재령이 고향인 심천호씨는 한국전쟁 때 가족들과 헤어진 후 날마다 가족과 다시 만날 날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심천호씨의 직업은 목사입니다. 미국 내 한인 교회에서 30년 넘게 목회 활동을 하다 몇 년전 은퇴하고 지금은 한인 사회의 기독교 봉사 모임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심씨가 목사의 꿈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을 키운 것은 고향인 황해도 재령에서였습니다.

"원래부터 믿는 가족이었어요. 양쪽 다. 제가 5살 때 그 때 어머니 등에 업혀서 교회 다닐 때 길 옆에 진달래 피었던 것 다 생생하죠. 지금 가면 황폐하고 발전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고향에 대한 향수는 절실하죠. 통일만 되면 다시 가서 살고 싶어요"

재령은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이 포교 활동을 펼쳤던 곳으로 당시 평양과 평북 선천과 함께 기독교 천하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가 빠르게 성장하던 지역이었습니다. 1924년 발간된 '개벽'지는 당시 재령을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재령은 교육도 상업도 농업도 심지어는 고리대금업자까지도 기독교인이다. 교회에 가는 날인 일요일은 애초부터 장이 서지 않았으며 장날이라도 대부분 상점들은 문을 닫았다'

그래서 그런데 고향에 대한 심씨의 기억은 교회와 연관된 것들이 많습니다. 주일이면 교회에 가서 친구들과 함께 예배드리던 일. 그리고 교회에 가느라고 학교 활동을 못해서 선생님께 혼나던 일까지 이제는 모두 그리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우리 학교 다닐 때 하루는 거기 대의원 선거, 여기 국회의원 선거와 같은 날인데요. 그날이 근데 주일이었어요. 그날 학생들은 선거 운동을 간다고 각 집을 방문하면서 이번 선거의 중요성 이런 운동을 했는데 우리는 주일날 교회에 가잖아요. 그럼 월요일 날 학교 가면 주일날 선거 운동 안 나온 사람들 나오라고 해서 그날은 공부 못하고 다시 선거 운동 다닐 때도 있었고. 또 기독교인 선생님의 경우는 자기도 학생들하고 함께 벌 받는 그런 경우도 있었고. 그래서 가끔 교양 주임한테 불려갔어요. 기독교는 이래서 나쁘고 연설을 들어야 했죠."

가장 간절한 기억은 역시 가족들과 함께 했던 시간입니다. 고향집에는 홀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여동생과 심씨 그렇게 다섯 식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비록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안계셨지만 심씨의 가족들은 과수원을 운영하면서 아무 걱정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그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일년 후인 1951년, 심씨의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잠시 피난 시켜야 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심씨는 출가한 누님이 있는 남쪽으로 혼자 떠나게 됩니다.

"잠깐인 줄 알았죠. 떠나는 날 친구가 우리 집에 와 있었어요. 우리 어머니가 음식을 해 주셨는데 시골해서 닭 잡아주는 것이 최고였어요. 그런데 먹기가 싫었어요. 제가 안 먹으면 어머니가 걱정하실 것 아닙니까. 그래서 친구한테 다 덜어주고 난 조금만 먹고 그런데 어머니가 또 돈을 많이 주셨어요. 그래서 난 필요 없다고 돈도 다시 드리고 왔어요."

심씨의 귓가에는 아직도 집을 떠나던 날 자신을 위해 기도하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우리 어머님이 내가 떠날 때 그렇게 기도해 주시더라구요. 이 아들이 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낮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렇게 인도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 주시더라구요."

출가한 서울 누님 댁에서 지내게 된 심씨는 언젠가 다시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자랑스러운 아들의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심씨는 국비장학생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고,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목사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아들과 늘 함께 해 달라는 어머니의 기도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심씨는 그동안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할 기회도 있었습니다. 목사로서 북한 지원 사업을 위해, 혹은 민간 방북단으로 방북 제의를 여러번 받았지만, 혹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사양해야만 했습니다.

"사실 저는 고향에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정식으로 미국 비자를 받고 가고 싶었습니다. 안타깝지만 그때까지 참고 안 갔습니다. 북한에서는 월남한 가족이 있느냐 그리고 종교를 따지고 그럽니다. 내가 미국 와서 목사까지 되었는데 그 정보가 북한에 가면 요주의 인물이 되죠. 이미 되어 있는지도 모르죠. 그 사람들은 미국 싫어하죠. 기독교 싫어하죠. 목사 싫어하죠. 그리고 한국에서 미국에 왔죠. 여러 가지로 불리하죠."

심천호씨는 어머니의 기도를 들어주셨듯이 이번에는 자신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매일 두 손을 모읍니다. 북한에 있는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살아있기를,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 남매가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리고 하늘나라 계신 어머니의 곁으로 가족이 모두 함께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굶주리고 학대받아도 참고 이기게 해달라고 속히 통일이 되어서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죠. 지금까지 참았으니까 잘 참고 머지않은 시간에 잘 되어서 가는 날 있으면 다 같이 손에 손 잡고 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