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의 보금자리: 보험설계사 탈북자 지영수


2007.10.01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북한에서 엘리트계층 또는 핵심계층에 있던 사람들도 일단 중국이나 러시아 등 외부세계를 접하게 되면 북한의 현실에 대해 눈을 뜨게 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함경북도 출신으로 김책공업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사 일했던 지영수씨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지난 1998년 중국을 다녀간 후 북한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함께 탈북을 했습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의 생활을 전하는 남한의 보금자리, 오늘은 지영수(가명)의 얘기입니다.

북한에서 명문 대학을 나와 연구사로 일하던 엘리트 계층의 지영수씨가 탈북과 강제북송의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2년 전 탈북에 성공해 남한에서 살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북한 체제를 믿고 따랐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조그마한 의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먹고 살기 위해 잠시 나갔던 중국에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고 모든 것에 놀랄 뿐입니다. 그것이 벌써 10년 전 일입니다.

지영수: 중국에서 있으면서 조선족 교회도 다니고 한국 사람들하고도 많이 접하면서 대한민국의 발전이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세계의 발전상을 알게 되고 지금껏 모르고 살았던 세계를 알게 되면서 내가 이렇게는 더 못 살겠다.

그래도 북한에서는 선택받은 계층의 주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과연 무엇을 보고 경험했기에 북한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을 건 탈출을 가족과 함께 시도 했던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지영수씨는 조금은 흥분된 목소리로 그 것은 바로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지영수: 정말 배신이라고 할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고 지금도 그것을 모르고 북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가련함 이런 것은 정말 느껴보지 못하면 정말 체험하기 힘든 겁니다. 북한식 사회주의 하면 세계에서 제일 으뜸으로 이때까지 교육을 받고 왔는데 북한에 아사상태가 났고 실지 나와서 보니까 6.25전쟁부터 시작해서 온갖 역사 위조와 부정부패가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엘리트로 살아왔다고 하지만 용납될 수가 없는 것이죠.

탈북과 강제북송 뒤에 1년간의 강제노동기간, 북한에서는 더는 살수가 없었습니다. 밤마다 북한당국이 금지하고 있는 남한의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길만 찾으면 재탈북을 하겠다고 맘먹었고 지난 2005년 4월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함께 남한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남한에 도착했을 때는 다시 인생을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희망에 벅차오릅니다.

지영수: 그때 나와서는 뭔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때는 내 자신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대학도 나오고 했으니까 자유경쟁 체제에서 뭔가 할 수 있겠다는 각오와 자신감에 차있었는데 1년 정도는 건설현장에서 노가다 일을 했습니다. 그것을 하면서 내가 자신 있게 접어들었던 한국생활이 아니구나 하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 한 달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한정부에서 주는 임대주택에서 가족과 함께 텔레비전도 보고 하면서 그냥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서서히 가장으로서 앞으로 남한에서의 생활에 대한 책임감이 들기 시작하면서 찾은 곳이 일용직 노동자를 찾는 인력사무소입니다.

지영수: 새벽 6시까지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5시에 깨어나서 택시를 타고 갔습니다. 택시비가 5천원 나오더라고요. 일을 첫 날 시작하고 총 6만원을 받았는데 거기서 10퍼센트를 사장님한테 줘야 하니까 6천원을 띠고 5만 4천원, 거기다 택시비를 빼니까 4만9천원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택시비를 아끼려고 집까지 오는 길을 익히려고 물어 물어서 걸어왔습니다. 버스타면 천원이면 가는데 새벽 6시까지 가야 하는데 그 시간에는 버스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한 시간거리를 걸어가는데 북한에서는 한 두 시간은 걸어다니는 것은 습관화 됐으니까.

공사장의 온갖 잡일을 하는 노동일은 지영수씨가 북한에서도 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두 딸과 아내를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지영수: 건설현장에 가면 주로 청소를 합니다. 아파트 단지 건물 집집마다 입주하기 전까지 오물이 많은데 그것을 하루 종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는 겁니다. 바닥까지 깨끗이 청소를 하고요.

지영수씨는 불안한 일용직 일에만 매달릴 수가 없어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자 집이나 토지를 매매할 수 있는 중개인 자격증인 공인중개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합니다. 공부에는 자신이 있었던 그였지만 남한의 법에 대한 이해는 하루아침에 공부한다고 마음처럼 그리 쉽게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좀 더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생업에 뛰어들게 되고 그렇게 남한에서의 1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에 알게 된 직업이 보험 상품을 파는 영업직입니다. 남한에서 보험 설계사로 불리는 이 일을 한 것이 이제 4개월째입니다.

지영수: 영업을 함으로써 우선 많은 사람들을 알 수 있고 대한민국에 와서 북한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대인관계...이런 일이 맘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하면 고소득도 올릴 수 있다는 것도 알았고요. 실지로 그런 분도 옆에 있고 ...영업이 고객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라서 저는 시민단체에 가입을 하고 회비도 내고 합니다. 그런 단체 활동에 참가를 해서 그곳 회원들하고 지금 많이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팽이처럼 돌아가면서 사람들 만나고 또 여가 시간에는 돌아가면서 상가나 식당 등을 돌면서 보험상품 유인물을 돌리면서 고객들을 잡는 겁니다.

아직까지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돈 벌이가 되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는 반드시 성공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어떻게 남한생활이 그려질지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없지만 그가 보험영업을 하면서 알게 된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이라고 믿고 오늘도 사람들을 만나 꿈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영수: 집사람과 아이들 앞에 떳떳하고 아빠나 남편으로 구실을 할 수 있는 그런 남자로 서있고 싶은 것이 꿈입니다. 그래서 보험설계사로 연봉도 높고... 또 통일 되는 날 북한에 나가면 형제 친지들 앞에 제가 대한민국에서 살려고 한 선택이 옳았다고 말할 수 있게 열심히 사는 것이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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