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의 보금자리: 애 낳으며 엄마생각 많이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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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이번에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남한은 국군포로의 생사확인과 송환문제를 북측에 제의했지만 북측의 시원한 답변은 얻질 못했습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의 생활을 전하는 남한의 보금자리, 오늘은 지난 2004년 남한에 입국한 국군포로의 딸, 탈북자 유명희(가명)씨의 얘기입니다.

북한에서 국군포로 자녀들은 아버지가 남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를 이어서 탄광이나 고깃배를 타는 등 개인의 능력과 상관없이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탈북자들은 하나같이 말합니다. 국군포로의 딸 유명희씨의 말입니다.

유명희: 억울하고 힘들었다는 것이 다같이 일을 하면 잘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잘해도 알아주질 안는다는 겁니다. 그 사람은 그냥 밑바닥 인생을 살아야한다는 겁니다. 아버지의 고향이 이남이란 이유 때문에...

남한 국방부는 현재 북한에 생존해 있는 국군포로의 수를 560여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6.25 전쟁 이후 실종 된 국군포로는 총 만 9천여 명에 달하지만 지금껏 살아서 남한으로 돌아간 국군포로는 60명에 불과합니다. 유명희씨는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통해서도 아버지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라야했습니다. 왜 이런 비극이 계속되어야 하는지 모르는 채 말입니다.

유명희: 아주 어리면 몰라도 어느 정도 되면 아버지 고향이 남한이란 걸압니다. 저희도 아버지 고향이 남한이라서 친척이 하나도 없고 그것이 제일 서럽더라고요. 학교 때 방학이 되면 다른 아이들은 친척집도 가고 하는데 저희는 갈 곳이 없어요.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참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아버지가 항상 식사를 하셔도 저희에게는 할머닌데 할머니가 고추장을 만드신 것이 그리 맛있데요. 고추장만 해서 밥을 먹어도 밥을 그리 많이 먹고 맛있게 먹는다고 그렇게 얘길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할머니가 담그신 고추장을 한번 먹어 봤으면 그랬거든요.

함경북도 출신으로 3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난 유명희씨가 탈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제도적으로 앞날을 기대할 수 없었던 것도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지난 1997년 있었던 막내 오빠의 공개처형 때문입니다.

유명희: 아버지가 남한 출신이고 하니까 정말 파리 목숨처럼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총살을 했습니다. 사람들을 공설운동장에 모아놓고요. 우리는 오빠가 죽은 다음에 알았습니다. 그래서 엄마도 통곡을 하고... 그런데 우린 집에서 울지도 못했습니다. 우는 소리가 나가면 정부를 반대하는 의사가 있어서 운다고 할까봐 겁이 나서 집에서 소리내 울지도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그랬습니다.

탈북한 뒤 남한으로 오는 길을 찾는 데 5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남한에서의 새로운 인생은 희망으로 가득했고 뭐든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자신감속에서 매일을 맞았습니다.

처음에는 북한에서 바닷가에 살았기 때문에 또 남한에 정착한 곳이 경상남도 통영으로 바닷가이기에 건어물을 파는데 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좀 더 나은 일을 하기 위해 컴퓨터 학원을 다닙니다.

유명희: 컴퓨터가 참 신기하더라고요. 처음에는 하나도 몰랐는데 컴퓨터 학원을 다니면서 일하러 다니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기업에 경리로 들어가서 다니면서 밤에는 학원에서 공부도 하고 그때는 참 시간이 30분도 아까워서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아침에도 남보다 1시간 먼저 출근을 하고 잠도 몇 시간 못자고 했는데도 사는 것이 재밌고 하더라고요.

남한생활 2년 만에 조선소에 다니는 남한 사람을 만나 결혼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유명희씨의 외로움 마음을 잡아준 것은 새로운 가정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은 것이 부모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게해 준 계기가 됩니다.

유명희: 임신해서 막달에는 힘들어서 우리 부모도 힘들게 나를 낳았을텐데 하고 부모생각 많이 하고 많이 울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임심을 하고 하면 친정엄마가 많이 챙겨주고 하잖아요. 그런 것을 보면 또 눈물이 나고...남들이 보는 데서는 안 울죠. 집에서 혼자 눈물 줄줄 흘리죠.

33살의 동갑내기 남편은 집안에서 장남인 탓인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남다릅니다. 유명희씨는 남한에서 느끼는 가장 큰 행복은 매일 먹는 이밥에 고깃국도 아니고 전기만 꼽으면 집안 청소도 또 밥도 지어주는 편리한 생활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북한에서와 달리 남한에서의 행복은 자신의 출신이나 배경을 따지지 않고 언제나 사랑으로 아내를 배려해주는 남편과 사랑스런 아이가 있기 때문이라며 남편의 고운 마음을 자랑합니다.

유명희: 차에서 내리면 문을 열어주고 신발을 신으려는데 애를 안고 있으면 신발 신겨주지, 회사에서 힘들게 일을 하고 와서도 애기를 목욕시키고, 애를 난지 40일정도 밖에는 안됐는데 제가 몸이 안 좋다고 애기 아빠가 일하고 와서 힘든데도 애 옷을 씻어서 널어놓고... 하루 종일 애 보느라고 수고했다고... 그러면 내가 너무 감사해서 자기도 힘든데 쉬라고 하고...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문제는 이산가족의 문제와는 별도로 다뤄야 한다고 남한의 가족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도 이산가족의 문제는 인도적 차원에서 남북이 협력하기로 한다고 공동선언문에도 명시했지만 국군포로의 이야기는 빠져있어 유명희씨는 안타가워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삶의 이모저모를 알아보는 ‘남한의 보금자리’ 오늘은 국군포로의 딸인 유명희씨의 행복한 남한생활 얘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