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초대석] '탈북자 대모' 주선애 명예교수

워싱턴-전수일 chuns@rfa.org
2010.05.31
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 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탈북자들의 대모로 이름난 주선애 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신학교를 다니다 공산주의의 기독교신앙 탄압을 피해 1948년 남조선으로 탈출한 그는 같은 고향 사람인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만난 뒤 탈북자 지원에 적극 나서게 됐습니다. 탈북자들이 시작한 자유북한방송의 개국을 도왔고 북한정치범수용소 얘기를 다룬 가극 요덕스토리를 세상에 알리는 데도 큰 힘이 됐습니다. 또 5년 전부터 이끌고 있는 탈북자종합회관의 현장체험 교육과정을 통해 탈북자들의 남한사회 정착을 돕고 있습니다.

젊은 탈북자들로부터 교수님, 어머니, 할머니로 불리고 있는 여든여섯 살의 주선애 명예교수를 전화로 만나봤습니다.

전수일: 탈북자들에게 ‘나 자신도 1948년에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라고 말씀하시는데 북한을 떠난 배경과 동기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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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선애 명예교수
RFA PHOTO/ 이진서
주선애 교수: 1945년에 해방되고 공산치하에서 3년이 되는 과정에 신앙의 자유가 점점 없어지게 됐습니다. 아이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도 금지됐고 아이들은 일요일 교회 갔다오면 월요일 자아비판을 해야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주일학교도 못오게 되고 청년들도 직장에 잘 못나가게 됐습니다. 제가 주일학교 중고등부를 맡았는데 학생들을 제 집에 데려다 이불을 창가에 걸어놓고 조용히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를 몰래 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교역자들도 자주 잡혀갔습니다. 모든 면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됐습니다.

전: 그때 평양 신학교에 다니셨던가요?

주: 네. 평양신학교였는데 위층에서는 남자분들이 하고 아래층에서는 여자가 따로 공부했습니다. 제가 1년 반 다니다가 월남했습니다.

전: 당시 나이가 24살 정도셨나요?

주: 네. 한국 나이로 25이었습니다.

전: 그때 가족상황은 어떠셨어요?

주: 제 남편과 저의 어머니 해서 세식구였습니다. 감시가 심해서 같이는 못가고 서울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따로따로 출발했습니다. 48년 8월 장마 때 떠났습니다. 3.8선 넘어 열이틀 간 낮에는 숨고 밤에 걸으면서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전: 2000년 남북정상 하고 난 뒤부터 많은 탈북자들이 남한으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2002년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를 만난 뒤 탈북자들에 대한 상담과 이들의 정착 지원활동에 적극 나서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어디서 무슨 일로 황 전 비서를 만나셨습니까?

주: 제가 평양의 정의여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한 해 한번씩 동창회를 하고 있고 지금도 모이는데요, 당시 제가 동창회에 강사로 갔다가 어느 동창의 동생뻘 되는 사람한테 황장엽 선생한테 인사하러 가자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제가 국정원 안에 있는 분한테 어떻게 가느냐고 했더니 자기만 따라오면 된다고 해서 세 사람이 갔었습니다. 가서 황 선생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답답한 지경에 처해 있었지만 동향 사람을 만난 것을 반가와 하시면서 자신의 얘기를 들려 줬습니다. 평양 상업학교를 나왔다고 하셨고 나이도 저와 비슷하신데 저보다 한 살 위 세요, 그리고 평양에서도 서양 선교사들이 많이 살았던 ‘양촌’이란데서 ‘놀았다’고 하시더군요. 저도 양촌에서 놀았거든요. 그러다보니 더욱 가까운 느낌이 생겼습니다. 외롭고 힘들어 하시는 것 같아 무엇이든 도와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황 선생께서 한 달에 한번 탈북자들 만나러 나오시는데 제가 그 모임에 북한 음식인 만두와 비지를 해 가지고 가서 드리곤 했습니다.
거기서 탈북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이들을 도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됐습니다. 그래서 황 선생니메 탈북자들을 상담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드렸더니 탈북자들이 모이는 사무실에 조그만 방 하나를 내어 주셔서 상담을 시작했습니다.
국정원에서 마련해준 ‘탈북자동지회란’ 단체가 쓰는 곳이었는데 국정원에서 마련해준 것입니다. 탈북자동지회는 황 선생님이 명예회장으로 계셨고 태국 주재 북한 공관에서 망명한 탈북자 분이 회장이셨습니다.

전: 2004년 탈북자들이 대북 인터넷 방송으로 시작한 ‘자유북한방송국’ 의 개국을 도우셨다고 하던데요.

주: 탈북자들이 그렇게 용기를 내는데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그 일을 시작한 김성민 국장이 당시 탈북자동지회의 총무였습니다. 총무로써 열심히 일하고 다른 탈북자들을 돕고 또 북한의 회복을 위해 애쓰는 분이었습니다.
중앙대학교 대학원을 다니며 공부도 열심히 했구요. 동지회 사무실에 가면서 가깝게 지냈습니다. 사연이 좀 길어집니다만 당시 30대 초반의 탈북 여성이 석달된 남자 아기를 업고 와서는 오갈 데도 없고 돈도 없고 아기 젖도 먹일 수 없다며 동지회 사무실을 찾아왔습니다. 거기에는 도움을 요청하는 탈북자들이 많이 옵니다. 이 분의 사연인 즉, 탈북자 남성을 만나 한국에 입국 후 하나원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하나원을 나온 뒤 정부가 준 집에서 셋이 살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남편이 북한에서 본부인이 탈북해 한국에 오고 있으니 집을 나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때가 겨울이었고 오갈데도 없는데다 이 여성은 폐결핵까지 걸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소문해 지하 방을 하나 구해 주기로 했습니다. 마침 제가 탈북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저희 영락교회의 한 장로님이 제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되고 싶으시다면서 2천만원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늘이 도왔다는 생각에 제가 거기에 천5백만원을 보태 3천5백만원을 만들어셋방을 얻어 이 모자가 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2년정도 살던 중 국정원에서 이 여성에게 새 집을 얻어주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 전셋돈이 빠지게 됐습니다. 그런데 당시 김성민 국장이 방송국을 시작하려했습니다만 돈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돈을 쓰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조금씩 갚고 있습니다. 제가 특별히 큰 일 한 것은 아닙니다.

전: 그래도 그것이 씨앗이 되어 개국 초기 인터넷으로만 1시간 방송하던 것이 지금은 단파로 5시간 까지 운영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 네. 이제는 사람도 많이 쓰고 제대로 궤도에 오른 것 같아요. 그저 감사할 뿐이죠.

전: 2006년 탈북자 정성산 씨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의 실상과 용서.사랑의 메세지를 담은 가극-남한에서는 뮤지컬이라고 하죠- ‘요덕스토리’를 만들 때 전화 협박도 많이 받고 재정적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격려를 하고 성금을 지원한 사람들 때문에 큰 힘이 되었다고 저희방송과 회견에서도 말했었는데요,주 교수님도 정성산 씨의 요덕스토리가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하는데 큰 힘이 돼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주: 돕고 싶었습니다. 그때 남한의 사정이 지성인 청년 학생들이 좌경화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 신학교에서도 젊은이들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남한이 사상적으로 위태롭게 되고 있다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강연을 통해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문화 수단을 통해 젊은이들을 바로 잡아 주고 북한의 실상을 보여 줘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정성산 감독이 제작한 요덕스토리는 젊은이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데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해 돕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요덕스토리 뮤지컬을 미국에 가서 공연하게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비행기표도 없고 미국에서 사용할 자금도 없는 상태라서 급한대로 제 예금통장을 꺼내 여비를 충당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기부할만한 여유는 없는 처지라서 꿔주는 것으로 했습니다. 공연은 그동안 많이 했지만 아직도 재정적으로는 어렵다고 합니다. 지금도 정 감독을 만나면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전: 2천5년에 탈북자 종합회관을 개관하셨는데 어떻게 열게 되셨습니까?

주: 얘기가 좀 길어집니다만, 황장엽 선생님에게 전도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질 안았습니다. 그래서 개인 전도를 잘하는 하용조 목사님에게 황 선생님을 전도해달라고 부탁했었습니다.

전: 지금 황장엽 선생을 전도해달라고 부탁했다는 말씀은 그분에게 예수님을 알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까?

주: 네.

전: 그래서 황 선생을 밖에 있는 교회로 나오시도록 하셨습니까?

주: 그분이 교회에 오시든 아니면 마음으로만 믿든 그분께 일단 복음을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주체사상을 내려 놓고 예수님 구원의 소식을 깊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었고 그분이 북한 전도를 하시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그분을 위해 계속 기도하는 한편 하목사님께 전도를 부탁했습니다. 곽규석 구봉서 씨 같은 연예인들을 포함해 개인들에게 전도를 능력있게 하는 분이었습니다. 제 부탁을 받고 당시 하 목사님이 동지회에 자주 와 주시고 선물도 갖고 오고 그러셨습니다.

전: 하용조 목사님 어떤 분인지 잠시 소개해 주시죠.

주: 하용조 목사님은 30여년전 제가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학생이었습니다. 마포교회의 전도사 일을 하면서도 연예인들과 성경공부를 하며 전도를 했습니다. 지금은 연예인 교회가 아주 커졌습니다. 지금은 온누리교회를 맡고 계신데 신도가 5-6만명 됩니다.
작년에는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께도 세례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께 많은 능력을 주셔서 많은 사람들을 잘 전도하고 있습니다 .
하용조 목사님이 그동안 제가 탈북자들과 상담하는 것을 보아왔고 또 제가 탈북자들하고 관계가 있는 것을 알고 있는 터에 마침 그 당시 베트남에서 탈북자 4백명이 한꺼번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하 목사님이 이렇게 많은 탈북자들을 포용하려면 교회가 나서야 한다며 양재동에 그 비싼 탈북자종합회관 사무실을 마련하고 간사까지 붙여주며 제게 그 일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지난 5년간 제 나름대로 탈북자들이 안정을 찾고 한국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4박5일씩 함께 체험하고 생활하는 새생활체험학교를 운영해 왔습니다.

전: 탈북자들이 입국하면 두어달 간 정착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배우는데요 새생활체험학교에서는 어떤 것을 배워줍니까?

주: 이 사람들은 북한에서 학습을 일생평 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김일성 어록을 배우고. 이런것을 매일 하다시피해서 학습을 싫어합니다. 우선 이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와 한이 많습니다.
치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말을 안하고 자신을 폐쇄합니다. 식구들과 헤어져 중국에 가면 중국인에게 팔려가고, 그렇게 살다가 아이를 낳고는 아이와 남편을 두고 떠나 오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북한에도 식구가 있고 중국에도 가족이 있습니다. 한국에 혼자 떨어져 나왔으니 외롭고 힘들고, 거기다 한국말은 알기듣기 어렵고. 집이 있고 먹고 사는 건 되지만 마음은 한없이 허전하고 아프고 눈물로 살게됩니다.
이런 분들에게 무엇을 배우게 하는 것보다는 우선 안정을 줘야 합니다. 서로 마음을 열고 얘기를 터 놓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4박5일 교육과정에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게임놀이를 하거나 화원이나 농원 같은 자연을 찾아가 마음껏소리도 지르고 뛰게하면서 한껏 사랑을 느끼도록 하면 마음이 열리게 됩니다.
또 최일도 목사님이 하는 ‘밥퍼’ 봉사단체나 양노원 홀트양자회를 직접 돌아다니며 생명의 존엄성이나 서로 나누는 생활을 보고 느끼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밥퍼’같은 봉사 현장에 가서 노숙자들과 함께 밥을 먹고 청소를 하다 보면 나누는 생활속에 사랑과 평안과 기쁨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탈북 교육생들은 이런 체험을 통해 ‘우리도 통일돼 북한에 돌아가면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 억압 때문에 어쩔수 없이 하며 사는 삶보다는 이렇게 나누면서 살아야 겠구나’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양노원을 방문해서는 노후 생활을 안심하게 사는 노인들을 직접 보며 민주주의 사회가 좋다는 것을 알게도 되고 마음의 변화가 옵니다.
지난 5년 간 1,080여명이 이 과정을 거쳐 나갔습니다. 지금도 이들은 제게 전화로 인사도 하고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의견도 묻고 도움을 청하기도 합니다. 또 아플 때나 결혼할 때에도 전화를 하곤 합니다.

전: 2007년에는 기독교 ‘높은뜻 교회연합’이 교회 건축비 자금이었던 200억원을 열매나눔재단이라는 탈북자들을 위한 사회적 기업을 세우는데 투자를 했다고 하던데요, 이런 결정에는 주 교수님의 탈북자 지원 활동에 대한 감동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주: 그분도 제가 가르쳤습니다. 기독교 교육과 4년을 가르쳤었죠.

전: 김동호 목사님이시죠?

주: 네. 제가 좋아하는 제자이고 그분도 저를 좋아하고요.
탈북자종합회관에 두어번 와서 우리가 하는 것을 보고는 탈북자들을 안정시키려면 무엇보다도 직업이 필요하겠다는 것을 느끼셨나봐요. 그래서 탈북자들에게 직업을 만주기위해 공장을 4개나 세웠습니다. 저도 직접 가서 봤는데 규모가 작지 않더군요. 한 곳은 박스를 만들고 또 한공장에선 블라인드를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핸드백을 만들면서 탈북자들을 채용했습니다.
그런데북한에서는 배급만 받아 자유 경쟁 기업 문화를 모르는 탈북자들에게 채용하기 전에 두달 쯤 직업 훈련을 시킵니다. 공장에 적응하게 하는 동시에 꿈을 줍니다. 열심히 배우고 일하면 나중에 통일되면 북한으로 돌아가 이처럼 공장을 차려 운영할 수 있다는 꿈 말입니다.

전: 탈북자 들이 한국사에 적응하고 정착하도록 상담도 해 주시고 지원하는 활동을 오랜동안 해오셨는데 탈북자들의 사회정착 과제는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풀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

주: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남한에 오면 너무나 굉장한 문화적 충격을 받습니다. 북한과 비교할 때 도저희 상상을 못하던 나라입니다. 사회 문화 모두가 너무 낯섭니다 . 다행히 중국을 통해 오면 중국에서 보고 들은 게 있어서 충격이 덜 하지만 그래도 직접 한국에 와 보면 모든 제도나 사용하는 용어도 달라 너무 낯설죠.
중국에서 갖은 고생을 하다 한국에 와서 정착금을 받아 생활을 시작하지만 그나마도 자신의 입국을 주선한 브로커에게 진 빚을 갚는데 쓰게됩니다. 집은 얻었지만 그 안에 있는 시설을 어떻게 사용하는 지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얘를 들어 단추 하나 누르면 냉방 온방이 되지만 그걸 몰라 못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어느 탈북자가 아파트에 입주했는데 방이 너무 추웠다고 합니다.
어떻게 난방을 하는지를 몰라 하나원에 계시는 목사님에게 밤 늦게 전화를 해서 물은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아파트 안이 너무 더운데 온도를 낮추는 방법을 몰라 화장실에 가서 잠을 잤다는 얘기, 전철을 탔지만 내려야 할 곳을 몰라서 황당했었다는 경험담 등 이처럼 한국 사회 모든게 낯설어 탈북자들이 처음 와서는 살기가 힘든 겁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방법도 있지만 탈북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길 꺼려합니다. 직장을 얻어도 체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 그러니까 얼굴도 같고 말도 같지만 탈북자들에게 한국은 완전히 딴 세상 같다는 말씀이네요.

주: 이 사람들에게는 딴 세상이에요. 적응을 해야하지만 이들에게는 그것이 너무 힘들지요. 또 한국에 들어오면 일단 죽을 고비는 넘겼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리면서 아프게 됩니다. 여기오면 대부분 아파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여하튼 이런 힘든 과정은 지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전: 어떤 해결책이 있겠습니까?

주: 우선 이 사람들은 마음에 병이 든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남한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해서 돕겠다고 접근했다가도 피차 상처만 받고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탈북자들로서는 북한에 있을 때 적어도 평등한 입장에서 살았는데 여기 오니까 남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업신여긴다는 생각을 갖게됩니다. 그래서 주위를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제대로 얘기하지 않거나 자신의 신분도 중국인이나 조선족으로 오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남한 사람들은 배신 당했다는 생각에 탈북자 돕기가 너무 어렵다면서 포기하기도 합니다. 인내심과 하느님의 사랑을 가져야 탈북자들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전: 그러니까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탈북자들이 남한사회에 와서 받는 충격과 탈북과정에 받은 상처, 특히 심리적인 아픔이 많기 때문에 이들을 이해하고 따듯한 마음으로 포용하고 사랑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이네요.

주: 네.

전: 그동안 안타까움도 많고 기쁨도 있었을 텐데 어떨 때 가장 보람 있고 기쁘셨습니까?

주: 저희 한 탈북 학생은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마치고 조선일보 기자가 됐습니다. 지난 어버이날 꽃다발을 갖고와 제게 주었습니다. 또 3.8선을 넘어온 다른 학생은 대학원을 끝내고 학생들을 모아 통일 토론회도 하고 지도자 역할을 잘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젊은이들은 통일 후 황폐한 북한에 돌아가 지도자가 될 사람들입니다. 이런 젊은이들이 남한 사회에 잘 정착하는 것을 볼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그 자신 평양 실향민으로서 탈북자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이들의 남한사회 정착 돕기에 헌신하고 있는 주선애 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저는 전수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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