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소년 축구, 지도자의 길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20-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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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씨가 대학선발 대표로 뛸 때 모습.
김창준 씨가 대학선발 대표로 뛸 때 모습.
사진 제공-김창준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보통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자라나는 세대를 꿈나무에 비유합니다. 특히 12살 이하 초등학교 학생에 해당하겠는데요. 오늘은 탈북해 자신이 남한에서 배운 축구를 통해 꿈을 심어주는 유소년 축구 지도자의 길을 걷는 김창준 씨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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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어린 시절 하면 일단 거기서는 내일을 보기 보다는 오늘은 뭘 하고 살까 오늘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이러며 산 것 같아요.

함북 길주가 고향인 김 씨는 만 9살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남한행을 합니다. 천진난만해서 사소한 것에도 웃음이 터질 나이인데 눈앞에 맞닥친 현실은 암울하기만 했습니다.

김창준: 미래가 없었죠. 북한에 있을 때는 꿈도 없었고 저는 그 당시에는 하루하루를 그저 아빠 일 도와주고 이러면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던 것 같은데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나가 뛰어 놀고 들어와도 밥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동네 형들 따라 다니면서 구리 같은 것을 주어서 맛있는 것을 사먹으려고 했던 적도 있고요.

기자: 그래도 어렸기 때문에 북한에서의 나쁜 기억만 있진 않을 것 같은데요.

김창준: 그래도 좋았던 기억은 많죠. 아이들이랑 겨울에는 썰매 타면서 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서 고기잡고 이러면서 놀고 친구들이랑 기억은 좋았던 기억도 많은데 그런 기억을 더 즐기면서 살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집이 부유하지 않다 보니까 그것을 만끽하지 못했죠. 그 나이 때에……

지난 2006년 남한에 도착했을 때는 12살이었고 초등학교에 5학년에 입학합니다.

김창준: 엄청나게 어려웠어요. 일단 공부도 따라가기 어려웠고요. 저는 아무것도 준비된 상태가 아니다 보니까 와서는 많이 어려웠고 무엇보다 말투 억양이 달라서 힘들었어요. 제가 아는 것도 부족하고요. 남한사회에 와서 모든 것이 처음이니까 그 친구들이 하는 놀이도 모르고 그 친구들이 하는 애기를 모르니까 끼어들 수도 없는 상황이고요. 그냥 머릿속이 캄캄했거든요.

언제나 운명은 우연을 가장해서 찾아온다고 했던 가요? 조금은 위축된 생활을 하던 김 씨는 답답한 마음을 공을 차면서 해소했습니다. 그렇게 빠르게 공을 차고 달리는 모습을 지켜본 교회 집사님이 축구 선수에 대해 말을 했고 이후 창준 씨의 축구 인생 1장은 시작됩니다.

김창준: 그 학교에 있다가 전학을 왔어요. 축구부가 있는 학교에 와서는 축구부 친구들이 쉬는 시간마다 저희 반에 와서 놀아주고 축구부 친구들에게 감독님이 저에 대해 다 말씀을 하셨고 챙겨주라고 해서 힘들지 않았어요. 초반에 한달 정도 저 혼자 동떨어져서 있을 때는 힘들었지만 축구부 있는 학교로 오면서 힘든 것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기자: 계속 선수로 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습니까?

김창준: 네, 저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너무 즐거웠고 재미있었고 또 무엇보다 내가 무언가를 선택해서 정말 많은 노력을 하면서 살았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고 그것에 대해 행복하고 만족해 하고 있습니다.

2019년 한남대학을 졸업한 창준 씨는 프로 선수로 활동하길 희망했지만 진로를 바꿉니다. 축구 인생의 2막의 시작이었는데요. 물론 갈등도 있었지만 창준 씨 주변에는 좋은 지인들이 많아 포기와 좌절이 아닌 꿈과 희망으로의 길을 개척하게 됩니다.

김창준: 제가 대학교 4학년을 마치면서 많은 테스트도 보고 했지만 주변의 은사님들이 도움을 많이 주셨고요. 축구선수를 끝났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고 돌아봤을 때 오히려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거든요. 축구선수로서의 길이 아니었을 때 좌절하지 않고 이 길이 아니면 또 다른 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지도자의 길을 선택했거든요.

지금도 많은 운동 선수가 자신의 종목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땀 흘리고 있습니다. 그 중 몇몇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돈과 명예를 동시에 얻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선수들은 운동선수가 아닌 평범한 사회인으로 돌아가 살게 됩니다. 창준 씨도 최고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김창준: 저는 정말 쉬지 않았어요. 선수 때 대학교 때까지 정말 일주일 휴가를 받았다면 하루 1시간은 훈련을 하고 쉬고 그랬고 고등학교 때까지는 주말에는 조기축구 아저씨들과 공차면서 기술도 배우고 남들이 쉬려고 할 때 저는 더 해야 실력이 는다는 생각에 공을 찼던 것 같아요.

그의 노력은 보답을 받습니다. 중학교 2학년에 유소년 축구 국가대표로 발탁 됐고 같은 해 서울시 축구협회장배 대회에선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합니다. 그리고 대학 때도 국제아시아연맹 대표로 국제 대회에 나가게 되는데요. 그의 포지션은 오른쪽 수비수.

김창준: 일단 유니폼 왼쪽 어깨에 태극기 마크를 달고 내 이름을 뒤에 세기고 나간다는 것이 영광이라고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더 책임감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열심히 뛰게 되고 자신감도 생기고요. 그리고 주위에 워낙 잘하는 친구들이 많아 보니까 든든한 마음도 들더라고요.

축구선수로 생활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 중 하나는 유소년 국가 대표시절 중국에서 북한대표 선수들과의 경기를 꼽습니다.

중국 대회에서 아이들과 시합 끝난 후.
중국 대회에서 아이들과 시합 끝난 후. 사진 제공-김창준

김창준: 굉장히 색달랐어요. 왜냐하면 내가 북한에 있었다면 과연 저 자리에 있었을 수 있었을까? 이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내가 지금은 이 자리에 있으니까 저 친구들과 할 때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 이런 생각이 컸습니다.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프로축구 선수가 꿈이었지만 창준 씨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지도자의 길을 택합니다.

김창준: 진로를 결정할 때 어떻게 할까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어요. 그랬더니 어머니의 한마다가 네가 노력했고 열심히 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네가 알아서 스스로 결정하기 바란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 말에 더 힘을 받아서 지도자의 길을 걸어서 어머니 더 행복하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돌아봤을 때 후회는 없고 아쉬움도 없고 앞으로 더 노력해 보려는 생각뿐입니다.

현재 초등학교 때 자신을 발탁해준 감독님 밑에서 축구코치로 활동하고 있는데요. 지도자가 되기 위해 자격증 준비에 열심입니다.

김창준: 은근히 엄청 많더라고요. 5개 과목 20문제씩 총 100문제를 보는데 평균 60점 이상이어야 통과 거든요. 범위가 좀 많다 보니까 한국 와서 공부도 같이 하긴 했지만 운동을 주로 하다 보니 공부가 좀 힘들더라고요. 하지만 이제부터 지도자의 길을 걸어야 하니까 공부를 빼놓을 수 없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공부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공을 차다 보면 12살 때 처음 단체복을 입고 선수로 뛸 때 생각이 나서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답니다.

김창준: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몸으로 하는 것은 저희가 시범을 보여주면 되지만 아이들에게 어떤 것이 정서적으로 더 가치가 있을 지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또 시대가 어떻게 변하는지도 파악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대학 때까지 등번호 3번을 달고 축구 경기장을 지켰던 김창준 씨. 이제 더 큰 꿈을 가지고 땀 흘리고 있습니다.

김창준: 제가 지도자를 시작하면서 목표를 세운 것은 국가대표 지도자를 하고 싶고요. 초등학교가 정말 중요한 위치에 있거든요. 아이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어딜 가도 잘 배워서 왔구나 너의 지도자가 누구였어 라고 했을 때 제 이름이 나오는 그런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제 2의 고향 오늘은 유소년 축구 지도자의 길을 걷는 김창준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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