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도 해가 뜰거야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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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북한자유주간 행사에서 김성민 준비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지난해 5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북한자유주간 행사에서 김성민 준비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RFA PHOTO/ 노재완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나의 남은 인생 어떤 것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이말처럼 비장하게 들리는 말은 없을 겁니다. 연습이란 것이 없고 언제나 실전으로 한 번뿐인 인생을 후회없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에는 그 누구도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것다고 봅니다. 오늘 소개할 사람은 북한인권개선을 위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남은 시간도 쭉 그렇게 살겠다고 합니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새로운 날을 살고 있는  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의 남한생활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성민: 의학적으로 이것은 안 된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오래 못산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줄 알았죠.

대북 라디오 방송을 하고 있는 탈북자 김성민 대표는 갑자기 자신에게 닥친 일에 망연자실 합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봤지 정작 자신이 비운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6년 3월 뇌종양 수술을 받았을 때의 상황입니다. 폐에서 전이된 암을 제거하는 수술이었습니다.

김성민: 표현은 안 했지만 너무 허무했죠. 무엇을 이루는 삶을 살고 싶었는데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노력은 해야겠다는 생각은 동시에 했습니다. 살고 싶은 생각도 있었죠. 제가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얼마되지는 않지만 통장이 있었는데 딸에게 통장 비밀번호를 알려주면서 만약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엄마 잘돌봐줘야 한다고 얘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에 아내에게 비밀번호를 다시 알려줍니다. 그리고 좀 비싼 약이라고 하는데 이거라도 보테서 나좀 살게해달라고 얘기했던 기억도 나고요. 정말 처음에는 허무했다가 꼭 살아야겠다, 살아서 고향으로 가야겠다.

김성민 대표는 탈북 당시 북한에서 인민군 대위였습니다. 군단 예술선전대 작가로 있다가 1996년 중국에 나왔다가 북송됐고 97년에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 내려서 구사일생 살아 다시 중국으로 탈북해서  1999년 한국에 입국합니다. 햇수로 만 18년을 남한에서 살면서 남한정착 3만 5천여명의 탈북민자의  대변인으로서 그리고 북한인권활동가로는 이름이 알려졌지만 한 집안의 가장으로 개인의 삶에 대해서는 언론보도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남한에서 개인 김성민으로의 삶은 어땠는지 기자는 질문을 해봤습니다.

김성민: 저는 없었다고 감히 말씀 드립니다. 새벽 4시, 5시에 출근해서 밤 10시까지 일하고 정말 그렇게 마르는 줄도 모르면서 말라갔었죠. 그러다가 이번에 앓게 되면서 가정의 소중함을 알게 됐습니다. 내가 그렇게 밖에서 일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게 도와주었던 아내 그리고 딸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됐고요. 어느 지인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고요. 요새는 다 큰 딸이지만 한 달에 한 번 데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김 대표는 남한정착 초기 언론과의 회견에서 남한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시간에 쫒기는 삶과 늘어난 욕심이 여유를 잊게 하는 것 같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결국 그런 삶이 자신을 쓰러지게 만들었는데요. 열심히 일한 남자들이 나중에 한결같이 후회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 크는 것도 제대로 못 보고 아내의 생일도 챙기지 못하면서 평생 일하는 기계처럼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온 것이 후회스럽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 김 대표는 가족에게 애정표현을 더 하려고 애쓰고 있답니다.

김성민 씨의 북한에서의 이름은 김진 입니다. 그의 아버지는유명한 김순석 시인 입니다. 김 대표는 남한에 가서 사촌들의 쓰는 돌림자인 성자를 넣어 성민으로 개명 합니다. 그리고 남한에 가서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일들을 손꼽았습니다. 지난 2006년 미국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을 만나 탈북자 문제를 설명하며 지원을 호소한 일 외에도 몇 가지 더 있습니다.

김성민: 업적까지는 아닌 것 같고요. 시집 한권을 낸 것, 대학원을 졸업한 것, 고인이 된 황장엽 선생님을 지근거리에서 15년동안 보필한 것 그리고 탈북자동지회, 북한인민해방전선, 자유북한방송의 대표를  역임하면서 탈북자 사회의 화합과 단결에 힘을 보탰다는 것 그리고 이 과정에 국경없는기자회 등에서 과분한 상을 받은 것…

그 중 김성민 대표가 의사에게 시한부 선고를 받은 순간에도 이어가고 싶었고 또 가장 애착을 갖은 것은  이것입니다.

김성민: 우리 자유북한방송은 2004년에 개국했습니다. 그전에 1년동안 준비 기간이 있었지만요. 그냥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 당시에도 벌어졌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노무현 정권 때 현 문재인 정권처럼  평화와 화합을 외치면서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북한의 인권문제라든가 특히 대북방송과 확성기, 대북전단 살포를 중단했죠. 이런 뉴스를 들은 탈북자들이 북한주민들이 그래도 유일하게 외부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것이 라디오인데 이것을 정부가 중단한다니 하면서 했던 것이고요. 지금도 그때를 돌이키면서 방송의 필요성을 더 깊이 느끼면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북한주민에게 자유의 목소리와 인간의 권리와 행복추구에 대해 전하는 방송은 최근 유튜브라는 매체를 통해 동영상까지 제작해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주민에게도 보이는 라디오로 거듭났습니다. 가정에 충실하면서 일에 더 매달리는 이유는 다시 한 번 덤으로 사는 인생을 곱절 갚아야 할 의무감에서 일까요?

김성민: 아마 크게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것 같습니다. 첫 번짼 탈북을 해서 중국공안에 체포가 돼서 북한으로 송환됐고요. 북한에서 국경지역에서 1차 조사를 받았는데 실제 제가 있던 부대에 있다가 탈북한 친구가 있는데 공개재판 날짜도 정해놓고 저를 기다렸다고 해요. 아마 공개재판을 했으면 총살당했을 텐데 제가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 내려서 살아났죠. 그리고 이번에 뇌종양으로 전이된 폐암말기… 사실 두려운 이야기죠. 제가 지금 이렇게 말은 쉽게 하는데 또 넘겼습니다. 제가 의지가 강해서 이겨냈다기 보다 하느님께서 그래도 불쌍한 탈북자를 들어서 살려주시지 않았나 생각하고요. 지금 내 인생은 사실 덤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람있고 열정적으로 그리고 후회없이 덤으로 얻은 인생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군 대위였던 김성민 씨는 남한에 가서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습니다. 그리고 계간 문예지 자유문학을 통해 총 12편의 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합니다. 김 대표가 쓴 시 중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는 작품이 유독 많은데요. 그가 사병생활을 마치고 고향집을 찾았을 때의 감정을 담은 병사의 자서전이란 시를 제가 낭독해 보겠습니다.

기자낭독: ‘산에 살다 고향으로 돌아온 인민군 전사가 있었습니다. 누구를 찾느냐는 경비실 노인네 앞에서 머뭇거리는 스물일곱 살의 제대군인입니다. 4층7호를 찾아왔는데요. 세대주 이름이…. 귀뿌리가 빨개진 전사는 고개를 숙인 채 돌아섭니다. 고향집은 그가 바친 석삼년의 군복무 기간에 모래성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돌아가셨고 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고, 스물세평 작은 집은 얼굴도 모르는 심 아무개의 차지가 되어버렸나 봅니다.’ – 김성민 ‘병사의 자서전’ 중

남한에 산지 벌써 스무해가 가까워지지만 고향은 언제나 그리움이고 아픔으로 생생합니다. 그리고 덤으로 받은 인생은 더 아름다울 것이라 믿습니다.

김성민: 정말 일단 소중하게 쓰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싶고요. 지금껏 일만 하면서 살았다면 앞으로는  일과 직장에서 가정에서 시간을 적절히 배분하면서 평범한 탈북자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탈북자의 삶이 복잡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남한사람과 좀 다른 것이 탈북자의 삶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일해서 돈도 벌고 북한인권활동도 열심히 해야 하는데 그래도 고향으로 다시 갈 수 있다는, 꼭 가야 한다는 희망을 안고 사는 열정을 안고 사는 것이 탈북자의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그런 충실하고 싶습니다. 그런 탈북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 시간을 초초분분 아껴가며 살아갈 생각입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자유북한방송의 김성민 대표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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