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박사학위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20-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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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열린 교육대학원 학위수여식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은 졸업생들이 학사모를 던지고 있다.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열린 교육대학원 학위수여식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은 졸업생들이 학사모를 던지고 있다.
/연합뉴스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사람은 배워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배우지 안으면 몰라서 못하고 더 나은 기회가 와도 잡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알면서도 외면하고 딴짓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은 40대 초반으로 이번에 교육학 박사과정에 합격한 장옥진(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장옥진: 어머니가 많이 아프시니까 약값을 못 구해서 내가 가서 돈을 벌어서 어머니를 살려야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청진 출신의 가두여성(가정주부)이였던 장 씨는 이렇게 도강을 했습니다.

장옥진: 제가 고향 떠나올 때 사실 이렇게 10년이 넘도록 돌아가지 못할 것을 생각을 못했어요. 3개월을 약속 하고 다시 돌아가기로 하고 떠나 온 길이어서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요. 이렇게 기약 못할줄 알았으면 그땅의 한줌 흙이라도 좀 가져왔을 걸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아있거든요.

중국에서 있었던 것도 언젠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인데 장 씨가 길을 떠난 후에 상황이 더 나빠졌다 사실을 확인하고는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장옥진: 사실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계속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고 돌아갈 길이 안열리고 또 어머니가 제가 중국에 와서 3년 후에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탈북민들은 중국에서  호적이 없으니까 언제 잡혀갈지 몰라 불안하고 북한에 있는 가족도 내가 돌아오는 것보다는 안전한 한국으로 가라 해서 그때부터 한국갈 준비를 했어요. 그때부터 1년 뒤에 한국에 왔어요. 그렇게 결국 중국에서 5년을 살았죠.

중국에서도 대도시 생활을 했었기에 남한에 가서 크게 신기하거나 놀랐던 것은 없었습니다. 처음 중국에서  길을 떠났을 때는 미국으로 가자고 생각을 했지만 난민으로 미국입국을 기다리는 사람이 이민자 수용소에서 2년 이상 대기를 하던 모습을 봤습니다. 그래서 탈북자에 대해 정부지원이 있는 남한으로 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고 남한땅을 밟게 됩니다. 와서는 남한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장옥진: 일단 마음가짐이 다른 것 같아요. 북한 사람들은 성격이 좀 급하고 직선적이고 이런데 한국분들은 그게 아니더라고요. 아주 예의를 지키면서도 정통 찌르는 그런 말을 하고 뭔가 차원이 다른 거죠. 그런데 그런 화법을 구사하려면 5년 이상은 있어야 하겠더라고요. 그전에는 내가 한국에 완전히 정착했다고 보기 힘들고요. 그리고 북한 사람들이 한국사람하고 잘 어울리질 못해요. 아무리 한 공간에 있어도 물과 기름처럼 섞이질 않거든요. 그것이 내가 완전히 한국화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봐요. 성격이나 문화의 차이가 분명히 있죠. 그런데 그것을 딱 꼬집어서 말하긴 어려워요.

이제 남한생활6년차가 되면서 생활도 안정이 됐고 하고 싶은 공부도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문세의 광화문연가 노래가 깔린다.)

장옥진: 원래 팝송이나 클레식을 좋아하는데 요즘은 광화문 연가에 꽂였어요. 이전에도 물론 좋아했지만 얼마전에 카페에서 공부하는데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뭔가 울림이 있어서 요즘은 매일 두세번은 그 노래를 듣는 거 같아요.

남한생활 2년반만에 찾아왔던 우울증 그로인한 무력감은 한때 장 씨를 무척이나 힘들게 했습니다. 버는 돈은 북한에 가족에게 송금하고 나머지는 자신을 위해 저축해야 했기 때문에 너무나 알뜰한 생활을 하다보니 자신을 챙기는 일에 소흘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보이지 않는 심적 압박감이 극에 달해서 공황장애 증상까지 겪습니다. 이젠 다 과거가 됐는데요. 처음 남한에 갔을 때 초창기 시절 이야기 들어보죠.

장옥진: 저는 제일 처음 와서 식당 설렁탕 집에서 뚝배기 나르는 일을 했거든요. 낮에는 학원가고 저녁 5시부터 새벽 2까지 밤근무를 했어요. 거기가 24시간 설렁탕 집이어서 3교대를 하거든요. 저는 밤에 일하고 집에 와서 자고 아침에 학원가고 했더니 2개월이 안됐는데 코피가 나고 몸이 견딜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해서는 내가 안되겠다고 해서 다음 했던 일이 PC방에서 카운터를 봤는데  제가 많이 서투니까 오래는 못했어요. 그 다음 세번째로 했든 일이 스크린 골프장에서 청소하고 시간 맞춰주는 일을 했어요.

처음 북한주민이 남한에 가서 할 수 있는 일에는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경험이나 자격증이 필요했는데 그런 자격조건을 맞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장 시작할 수 있는 단순노동일을 하다보니 몸이 견뎌내질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학원에서 컴퓨터 웹 디자인 공부를 1년하고 사무직 일을 합니다.

장옥진: 채용이 됐던 것이 제가 중국어를 잘하니까 회사에서 중국어 홈페이지를 번역하고 운영하는  책임을 저한테 맡겨서 그걸 2달 했어요. 하다보니까 팀장이 저보다 10살 아래였는데 그분의 손동작을 제가 따라가지 못하겠는 거예요. 그분은 10분만에 하는데 저는 2시간을 해도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내 길이 아니다 해서 과감하게 그만두고 다시 학원을 갔는데 그게 통역학원이었어요. 가서 7개월 공부하고 관광통역사 자격증을 땄어요. 이 자격증이 3차 시험까지 있는데 중국어, 이론 과목 4과목 그리고 면접인데 4월부터 시작했던 공부가 11월 중순에 자격증을 따서는 12월부터 통역사로 2년을 일했죠.

중국인 여행객들을 상대로 통역일을 하다보니 많이 다니고 수입도 괜찮았지만 변수가 생겼습니다. 관광일이라는 것이 일감이 많을 때와 적을 때가 있는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사드 미사일 문제로 중국에서 한국을 찾는 관광객이 뚝 끊어졌던 겁니다.

장옥진: 그때 전염병이 돌고 또 사드 문제로 중국에서 한국 여행 금지령을 내려서 여행 가이드가 할일이 없어졌잖아요. 그리고 생각을 해보니까 가이드는 자격증이 있으니까 정년퇴직을 하고도 일할 수 있고  북한에서의 경력을 살려봐야겠다고 생각을 했던 거죠. 제가 북한에서는 교사였어요. 그래서 한국에 와서 보니까 저희 같은 교사들이 지금 국공립 초등학교, 중학교에 가서 수업을 하는 그런 직업이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그런 일 하고 있습니다.

현재 통일교육을 진행하는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남한생활이 해를 거듭할수록 생각에 변화도 경험하게 되는데요. 이 또한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장옥진: 아직도 남한사람이 다 됐다는 느낌은 못받고 있는데요. 2년차에는 그냥 내가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다는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왜냐하면 먹고 사는 것이 급하니까 경제적인 만족감을 얻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3년이 지나면 내가 앞날을 생각하는 거죠. 앞으로 일생 먹고 사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떻게 수입과 지출을 맞춰야겠다 하는 생각을 하고 안정적인 직업을 원하고 돈보다는 건강 그리고 정년이 보장되는 직업에 대해 고민을 하죠. 그리고 5년이 지나니까 지금보다는 노후 걱정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연금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내가 지금 직업상 버는 돈이 충분하지 못하다 국민연금이 조금 부족해 보인다 하면 다른 연금도 들고요. 이런 식으로 인생설계를 시작하는 거죠. 그렇게 해마다 다른 것 같아요.

남한에서 준박사 과정을 졸업한 정 씨는 올해 교육학 박사 과정에 도전합니다. 계속 더 공부하게 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장옥진: 박사나 석사를 하는 것은 내가 뭔가 지식의 폭을 넓히려는 거잖아요. 그래서 공부를 해 둬야 앞으로 필요로 교육통합의 방안이라든가 대책 등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부딪치는 여러 문제가 많아요. 그런 것에 대해 생각을 하고 대비를 하는 거죠. 내가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예요. 뭔가 정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서 스스로 자기계발을 하는 거죠.

제2의 고향 오늘은 장옥진(가명) 씨의 남한생활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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