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이 주는 행복
2018.03.20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모르면 용감하다란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게 약이란 말도 있죠. 어떤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알지 못했을 때는 겁없이 달려들었다가 조금씩 알게 되면서 생각이 많아집니다. 여기에 사회적, 문화적, 도덕적 관습 등이 더해지면 그나마 남아있던 자신감까지 사라지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한 번 한 사람은 배움을 갈망하게 되는데요. 오늘은 남한생활 10년차 고미영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고미영: 탈북민들이 공부를 안 하면 안 됩니다.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겠죠. 그래도 알아야지.
고 씨가 이렇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북한에서 17살때까지 무용을 하고 졸업한 후에는 돌격대 기통수(연락병)로 있다가 제대를 하면서 한번도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던 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미영: 북한에서 제가 공부를 못 해봤어요. 제가 어릴때부터 무용을 했어요. 평양예술축전도 가고요. 부모가 러시아 출신이라 신분이 안 좋아 학교도 못 갔고요. 그때 방황하면서 다녔는데 지금에 와서 애를 잘 키우면서 엄마가 못 배웠던 것을 채우기 위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1998년 탈북해 남한에 간 고 씨는 이런 이유로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수준 그리고 더 나아가 남한생활에 불편이 없을 정도의 학습을 원했던 겁니다.
고미영: 지금에 와서 애를 키우면서 이 사회에서 애를 잘 키우려면 뭘할까 하다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인터넷에서 평생교육원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했고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어요. 그리고 졸업해서 교회 장로님이 추천을 해서 신학공부를 해서 지금 대학 3학년으로 편입했는데 올해 졸업반이 됐어요.
남한에 초창기에는 직장을 잡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사회복지사 채용공고를 보고 찾아간 직장 면접에서 뽑아만 준다면 젊은이들 못지 않게 열심히 잘할 수 있다고 강조 했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자격요건에 맞지 않아 채용은 되지 않았습니다.
고미영: 젊은이들이 많은데 경험도 없고 그러면 나는 북한에서 온 40대인데 경험이 있다 봉사는 많이 했고 나는 대리운전을 했기 때문에 운전을 잘한다. 다만 말투가 좀 그렇지만 익숙해지면 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젊은 아이들은 앞날이 창창하지만 나이가 좀 있는 사람들은 어디 안가고 열심히 할것이다 했어요. 3명 면접을 봤는데 대학을 졸업한 젊은 20대는 붙었고 저는 떨어졌어요.
남한생활에서 가장 큰 변곡점이 된 것은 배우자를 만난 겁니다. 남한 남성을 만나면서 인생의 진로는 한 번 더 변합니다.
고미영: 한국에 4월 23일 와서 회사에 갔는데 남편을 만났어요. 1년동안 돈을 벌다가 아이 낳고 하나님이 이 길로 인도하시는구나 하고 신학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뭘 할려고 하고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다니면서 성경을 똑바로 알고 싶어서 신학공부를 한 거예요.
같은 직장에서 남편을 만났는데 이후 둘다 퇴사를 합니다. 이후 남편은 상을 당한 유족의 요청에 따라 장례절차를 도와주는 직업인 장례지도사가 됩니다. 하는 일은 사망진단서를 확인하고 장례에 필요한 수의, 관 등의 장의용품을 준비해 장사 지내는 일을 돕는 겁니다. 고 씨는 남편 보조역활을 하다가 다시 한번 직업을 바꾸게 됩니다.
고미영: 운전은 내가 했는데 장례식이 있다는 곳은 밤낮 없이 다녔어요. 그런데 좋은 일도 아니고 마지막 가시는 분들의 일을 잘해드려야 하는데 정말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을 하면 안 되지 않나 싶어서 그만두고 대리운전을 했어요. 지금은 탈북단체를 설립했는데 남편이 기획실장으로 일하고 나는 사무총장으로 일해요.
어떤 사람은 한 직장에서 오래 근무하는 것이 좋다 하고 어떤 이는 자기 적성에 맞춰서 자꾸 직업을 바꾸는 것을 권합니다. 어느 것이 낯선 곳에서 빨리 정착하는데 도움이 될지는 참 말하기 힘든데요. 이런 고민들이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고미영: 먹고 살자고 하니 이것저것 다 해봐야죠. 내 진로를 말해주는 사람도 없잖아요. 복지사 공부를 했다고 누가 직업을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북한 같았으면 장사배낭을 지고 달리는 기차빵통 위 전기선이 왔다갔다 하는데 거기 타고 다녔는데 거기 비하면 지금 천국이죠. 그런데 못 살겠다고 하면 안 되잖아요. 거기서는 입당하겠다고 힘들게 일하고 생활하다나니까 뼈가 다 망가져서 허리 아프고 다리 아프고 해서 그렇지 여기서 이밥을 먹고 살지 경철서에서 명절이라고 선물 주고 쌀 걱정하지 않고 살잖아요. 북한에선 쌀한알 먹겠다고 장사를 하고 다니고 먹을 것만 기다리면서 엄마 올때까지 아이들이 잠을 안자고 기다리고 했는데 지금은 천국이잖아요.
고 씨가 현재 자신이 처한 환경이 천국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동안 북한에서 그리고 잠시 돈벌러 가자며 건넜던 중국에서의 생활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고미영: 저는 중국에 살자고 간 것이 아니라 한 달만 가서 돈 벌어 오자고 갔는데 그게 팔려간 것이거든요. 중국말 모르지 시골에 들어갔지 하니까 …말만 알면 도망간다고 3년을 화장실 갈때도 따라다녔는데. 뉴스를 봤어요. 한국에 북한 사람들이 가고 하는 것을요. 이렇게 잡히는 것 피해다닐 것 같으면 한국으로 가자.
일부 탈북자는 남한생활이 참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기도 합니다. 일단 문화적응이 첫째고 북한에 가족 그리고 중국에 있는 아이들 걱정에 이중고통을 받는 다는 겁니다. 그런데 고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미영: : 그런 스트레스는 다 있어요. 힘들어도 어떻게 극복하는가 자기에게 달렸죠. 힘들다고 자꾸 하지말고요.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만 이겨내야죠. 저도 힘들었어요. 남편이 회사 퇴직을 하고 난 회사 나와서 제가 돈번다고 하다가 사기도 당하고 정말 힘들게 살았어요. 생각같아서는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을 생각도 하고 그렇지만 자식이 있는데 내가 죽으면 어떻하나 엄마를 얼마나 원망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내가 살려고 왔지 죽으려고 온 것이 아니다 하면서 살았어요. 봉사도 하면서 나는 많이 필요없다. 빈주먹에 왔다가 빈주먹으로 가는 인생인데 하나님 은혜로 나는 이렇게 먹고 산다.
배워야 한다 공부해라 이런 말을 특히 주위에 젊은 탈북자에게 말하는 고미영 씨. 일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공부의 재미는 그 무엇에 비교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고미영: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몰랐어요. 공부하면 할수록 조금씩 아는 거예요. 처음엔 모르고 공부하지 알고 했겠어요. 오늘도 강의를 들어보니까 남편이 회사 망하고 집을 나가고 하니까 여자가 죽고 싶지만 자식 때문에 죽질 못했는데 이제는 그 남편이 들어오면 남편이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것을 보고 안아주고 하니까 가족이 화목해졌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것보다는 행복한 것 아닌가요? 행복한 거 같아요.
이제 10살 된 딸은 초등학교 2학년이 됐습니다. 아이와 함께 공부하며 새롭게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고미영: 행복은 여기는 잡으러 다니는 것 없고 강요하는 것 없고 북한에서처럼 사상투쟁도 없잖아요. 마음껏 배울 수 있는거. 내가 배우려는 의지만 있으면 마음껏 배울 수 있잖아요. 난 그게 제일 행복해요. 앞으로는 70살이 돼도 배울 수 있을 것만큼 배워서 석사 박사…박사는 좀 힘들더라도 노력은 해볼 겁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고미영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