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사람은 어려서는 부모님 슬하에서 보살핌을 받지만 어느순간부터는 홀로서기를 해야 합니다. 부모라도 자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기 때문인데요. 보통 보면 어렸을 때 일찍 생활전선에 뛰어든 사람이 성인이 돼서도 생활력도 강하고 성취감이 크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환경에 대한 적응력도 뛰어난데요. 오늘은 청소년 시절 남한에 입국해 공부와 일을 병행 하면서 자신의 꿈을 키웠다는 김경옥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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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옥: 그 때는 제가 12살이었습니다. 2007년이었는데 겨울에 제가 탈북했어요.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인 김 씨는 이렇게 어린 나이에 도강을 합니다.
김경옥: 탈북하는 과정에 얼음도 깨지고 그래서 얼음에 빠져서 못나오는 분도 계셨고 그때 경계가 심하다 보니까 군인이 많아서 그 군인들 눈을 피해 땅속에도 숨고 몇킬로를 달려도 봤어요.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은 추억이지만 그때 당시는 제가 목숨걸고 하는 상황이라 너무 두렵고 무서웠었어요.
기자: 12살에 탈북한 이유는 뭔가요?
김경옥: 엄마가 중국에 갔다가 북한보다는 중국이 훨씬 더 경제적으로 좋고 거기 가면 밥도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고 엄마가 중국으로 일하러 갔다가 왔는데 나도 가고 싶다고 해서 엄마랑 같이 중국에 가게 됐어요.
추운 겨울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 5월 한국행을 합니다. 새로운 인생의 시작인데요. 남한도착 당시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별천지였습니다.
김경옥: 우선 나라가 너무 화려하고 불빛이 많았고 길을 걷다보면 수 많은 거리의 간판이 신기하고 저에게는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이상 뛰어 넘어서 온 느낌이었어요.
낯선 남한생활이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습니다. 용기가 필요했죠.
김경옥: 두려운 것은 제가 어리다 보니까 학교 생활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북한에서와 너무 말도 틀리고 하다보니 친구들이랑 잘 지낼 수 있을지 너무 두려웠어요.
기자: 비교를 하자면 남한의 학교 생활은 어떻던가요?
김경옥: 남한의 학교생활은 토끼가죽도 안내고 고철도 안내고 구리도 안내고 하지만 남한의 학교생활은 숙제가 많습니다. 학교 갔다와서는 그 숙제하려고 밤을 꼬박 세고 다음날 학교를 가죠. 북한에서는 공부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남한에서는 진짜 공부를 안하면 한국에서 살아남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여기 오자마자 시험을 봤는데 15점이 나왔거든요. 그래서 진짜 잘하자 해서 1년 지나선 모든 과목이 60점 이상으로 올랐어요. 한국은 정말 공부를 해야 하는 세상인 것 같아요.
기자: 반에는 1등도 있고 꼴등도 있고 한데요. 남한 아이들과 어울린 얘기도 해주세요
김경옥: 제가 학교를 다닐때는 학교 일과를 마치고 와서는 저는 항상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래서 남한친구들이랑 어울려서 놀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그러다보니까 제가 돈을 내게 되더라고요. 다른 친구들은 용돈을 받아 썼지만 저는 제가 아르바이트 해서 돈을 벌었으니까요. 친구들 보다는 제가 돈을 썼어요. 그리고 제가 돈을 써야 그 친구들이 다가오는 느낌도 들었고요.
기자: 13살에 할 수 있는 일이 뭐였나요?
김경옥: 그때는 제가 성인이 아니어서 부모님 동의를 구하고 전단지 아르바이트, 신문배달 그리고 감자탕 집에서 일했는데 거기서 어린친구들은 안받아서 감자탕집 뒤에 천막 쳐놓고 그 안에서 그릇씻고 설거지 하고 그런 일을 했어요.
기자: 제가 좀 혼란스러운데요. 생활이 어려워서 그랬나요? 공부하기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그런 일을 한 이유가 뭔가요?
김경옥: 저희같은 경우는 탈북 브로커 비용을 내느라고 엄마가 저에게 용돈을 하루에 500원씩 줬거든요. 그 돈으로 안되겠다 싶어서 그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어요.
기자: 엄마가 나가서 돈벌어 생활하라고는 안 했는데 본인이 결정했다는 겁니까?
김경옥: 네, 제가 돈이 필요하니까 했어요. 친구사귀려고 해도 돈이 필요하고 하니까 스스로 결정했어요. 엄마는 반대하셨어요. 한국까지 와서 왜 이렇게 힘들게 사냐고 내딸이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다른 평범한 학생처럼 살아달라고 하셨는데 제가 돈을 벌게 됐었어요.
누가 가르쳐 줘서 또는 지시해서 했던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판단했고 필요에 의해 행동했습니다. 보통 어른들은 자신의 인생경험에 따라 무슨일이든 신중하게 되고 재게 되는데 김 씨는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죠. 아주 단순했습니다. 필요하다면 하고 이왕 시작했으면 열심히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렇게 무난하게 일반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사건이 터졌습니다.
김경옥: 저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일반학교에 다니다가 2010년 북한이 남한 배를 폭하시켜서 천안함이 터졌다 이런 설이 돌면서 학교에서 제가 북한에서 왔다고 왕따가 돼서 중학교 때 한겨레중고등학교(대안학교)로 전학을 했어요.
탈북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로 전학을 한것은 큰 변화였지만 여기서도 김 씨는 크게 감정의 동요없이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성격이 그대로 나타나는 대목입니다.
김경옥: 우선 저는 일한게 너무 행복했던 것이 북한 같은 경우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한정적인데 한국에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뭐든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반갑웠고 좋았거든요. 북한보다는 한국이 내가 노력한만큼 성장하고 커질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아요.
기자: 북한에서 12살까지 살았는데 많은 제약을 그때 당시에도 느꼈던가요?
김경옥: 어머니가 우선 북한에 말하고 중국에 갔던 것이 아니고 돈을 안내고 나라의 허락도 안받고 중국에 넘어갔다가 돌아와서 저희가 감시를 많이 당했거든요. 그래서 뭘해도 안 됐었거든요. 그런데 한국에선 다른 거죠. 뭐든 할 수 있는 한국이 좋은 거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김 씨는 자신의 미래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한지를 고려해 제일 만족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김경옥: 저는 지금 로드메니저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한국에 와서 꿈은 자가용 사는 것이어서 13살때부터 20살때까지 돈을 벌어서 차를 샀어요. 그리고 갑자기 그 꿈이 사라지다 보니까 무슨일을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차를 샀으니까 꿈도 사라진거죠. 생각을 해보니까 어렸을 때부터 차에 관심이 많다보니까 자동차로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 해서 택시 운전을 10개월 했어요. 그런데 택시는 언제든지 할 수 있는건데 다른 내가 좋아하고 행복해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 해서 찾은 것이 로드메니저입니다. 지금은 로드메니져를 하려고 이번에 대학에 들어갑니다.
기자: 로드 메니저가 뭐하는 겁니까
김경옥: 로드메니저는 가수나 연예인 영화배우들의 일정에 따라서 운전을 해주고 해외가 나가면 같이 가서 연예인이 일정을 편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로드 메니저 거든요.
제2의 고향 오늘은 꿈을 향해 매일 도전하는 김경옥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