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행, 목숨걸만 했다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20-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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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씨는 나중에 요양원을 하는 꿈을 품고 있다. 사진은 충남 청양의 한 노인요양원.
이영주 씨는 나중에 요양원을 하는 꿈을 품고 있다. 사진은 충남 청양의 한 노인요양원.
/연합뉴스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중국에서 두 번 강제북송 당하고 세 번째 탈북에 성공해 남한에 도착한 여성이 있습니다. 북한에 가서는 전거리 교화소에서 생지옥을 경험하기도 했는데요. 탈북해서 남한까지 온 것은 목숨을 걸만한 일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함경북도 온성 출신의 이영주 씨의 이야기 입니다.

이영주: 여기서 인격이 있고 인권이 있고 한 삶이 어떤 특별한 날을 지정하거나 일을 지정해서 말하기 보다 그냥 매일 매일 감사하고 목숨을 담보하고 올만한 나라다 라고 말하고 싶어요.

현재 산후 조리원에서 조무사로 일하는 이영주 씨는 지난 1997년 탈북 합니다.

이영주: 그때는 생계형 탈북이죠. 중국에서 9년을 있었는데 아이를 키우는데 신분이 없으니까 항상 아이한테 미안하고 중국에서 사는 삶이 불안하고 하니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한국으로 가야겠다 하고 떠났는데 두 번 북송을 당했어요. 끌려가서는 회령시에 있는 전거리 12 교화소에서 3년반을 있었어요. 사실은 개인적으로 신앙 안으로 사는 사람이고 한국 행을 해서 영 나올 수 없는 요덕을 가야 했는데 교화소를 가서 한국에는 세 번 탈북해서 온 거죠.

남한에는 2011년 12월 입국합니다. 그때 이 씨는 40대였습니다. 그냥 막노동으로 계획 없이 살기는 싫었다고 했는데요. 이 씨는 남한생활에 필요한 부분을 채우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됩니다.

이영주: 자동차 부품 만드는 공장에 다녔어요. 한국에 오니까 자유스럽고 사람처럼 살고 좋은데 빌딩 안에 갇혀 있는 무슨 섬에 사는 느낌이 들었어요. 사람들의 정서가 서울에 살아서 그런지 좀 메말라 있더라고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식당 가서 그릇 씻는 일밖에 없는데 그분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목숨 걸고 이 땅에 왔는데 40대 초반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싶어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주말에서 대학 다니고 평일에는 일하면서 저녁에는 간호 조무사 학원을 다녔어요.

나라에서 임대주택도 주고 직업훈련도 시켜주고 또 일할 수 없는 사람은 기초생활지원금을 줘서 생활은 가능했지만 이영주 씨는 쉬운 길보다는 보상이 큰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이영주: 죽을지 살지도 모르고 이것을 해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휴식도 없고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살았어요. 한국에 온 탈북자들의 나이는 다 다른데 사회에 나올 때 사회적 나이는 똑같잖아요. 저희가 한국에 발을 내디딘 것부터 한살이니까요. 똑같이 경쟁을 해야 하고 남한사람들과 또 경쟁을 해야 하니까 그 사람이 걸을 때 우리가 날지는 못해도 뛰어야 하잖아요. 그런 마음으로 제가 부품 공장에 다녔고 주말에는 대학에 다녔고 저녁에는 학원을 가고 그랬어요.

이 씨의 얘기를 들어보면 멈출 줄 모르는 열차가 철길을 폭주하는 그런 모습이 상상되기 까지 합니다. 그 모습이 위태롭고 또는 힘들게 보이기도 하지만 본인은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영주: 북한에서의 비교보다는 제가 항상 매일 감사한데 매일 그런 것을 느끼죠. 운전할 때도 그렇고 옆 사람과 얘기를 할 때도 그렇고요.

대학에서는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직업은 관련업종에서 찾았습니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 온다고 일단 남한에서 무엇을 하면서 앞으로 살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이영주: 제가 그때 사회복지를 공부했는데 북한에는 없는 말이거든요. 아동복지, 노인복지 등 많은데 저는 노인복지가 마음에 닿았어요. 내가 한국에 뼈를 묻어야 하는데 나라에서 탈북자를 위한 지원을 많이 해주는 특례법이 있지만 노인에 대한 법이 많이 없고 저도 할머니 손에 자랐고 해서 노인복지에 관심을 갖게 됐죠. 나중에 요양원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거기에 필요한 공부를 해야 하고 자격증을 따야 하고 해서 간호조무사를 한거죠.

이 씨는 간호조무사로 일한 지 꽤 돼서 이제 일하러 가서도 자연스럽게 제 몫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이영주: 제가 광명시 쪽에 있는 산후조리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고 있어요. 생후 3일에서 5일 정도 지난 신생아들 돌보는 일인데 신생아 하고 산모를 보름 정도 돌봐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기자: 산후조리원은 24시간 하기 때문에 보통 3교대로 일하잖습니까?

이영주: 네, 맞아요. 저는 밤근무를 많이 해요. 2년 전에 책을 냈는데 출판사 분들을 많이 만나야 하고 해서 낮 시간을 비워 놔야 했는데 그 시간에 내가 일하면 만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밤일을 시작했는데 또 교회 일도 하고 하니까 낮에 시간이 필요해서 밤일을 선호하게 되더라고요. 그때부터 쭉 4년정도 일하고 있어요.

기자: 그러면 집에서는 보통 몇 시에 나가시는 데요?

이영주: 네, 10시반에 일 시작하니까 집에서 9시 40분정도 나가죠.

기자: 밤에 일하고 낮에 사람 만나고 또 교회 가고 하면 잠자는 시간이 많이 부족하겠어요.

이영주: 그냥 통상 하는 말이 죽으면 실컷 자는데 이렇게 말하죠. 주어진 삶 안에서 피곤하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못 하거든요. 그래서 미국은 아침이니까 내가 미국의 아침에 출근하는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하죠. 내가 밤에 나가 일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힘들거든요. 하루 5시간 정도 자고 저도 아마추어긴 한데 유튜브 방송도 잠깐씩 찍어서 올리고 해요. 내가 책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죠. 다른 탈북자들이 하고 있는 것을 피해서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예를 들면 교화소 얘기 같은 거요.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람들이 있어요. 돈을 떠나서 인연을 맺어 힘이 되고 보탬이 되는 사람 만나서 수다도 떨고 책도 같이 보고 그런 것을 제가 굉장히 좋아해요.

2018년 이영주 씨는‘회령 전거리 12교화소’ 책을 발표합니다. 중국에서 강제북송 당한 후 북한 땅에 도착해 경험한 감옥이야기입니다. 이 씨는 책을 통해 탈북자란 어떤 사람들이고 또 북한인권개선이 왜 필요한지 한번쯤 생각해 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책을 썼다고 하는데요.

이영주: 왜 탈북자들이 생겼는지 그냥 탈북자라는 이름이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지 또 남한 분들이 북한에 대해 모두 마음이 열린 분만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우리도 정권이 바뀌고 할 때마다 솔직히 어디에 서야 할지 모르겠고 탈북민들은 정치를 떠나서 그냥 열심히 살 뿐인데 정치몰이에 이용되는 것이 너무 싫고 그냥 한 인간으로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죠. 북한에 김 씨 일가가 그 나라를 통치하지 않았으면 탈북도 안 했을 것이고 남한에서도 그냥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라를 잘 못 만나서 우리가 아픔과 슬픔과 듣지 말아야 할 많은 욕을 듣고 산다. 이런 것을 얘기 하고 싶고…슬프잖아요. 내가 북한을 욕하는 그런 것보다 북한에서 살았던 인간 이영주로의 삶을 책으로 냈고 또 유튜브로 얘기를 하는 거죠.

탈북자로 중국에서 살아야 했던 사연 그리고 전거리 교화소에서의 3년반 생활이 쓰여진 책은 벌써 두 번째 인쇄가 됐습니다. 시간을 쪼개서 유튜브 동영상을 만들어 세상과 소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시간이 소중하다고 말하는 이영주 씨. 그는 지금 현재가 제일 행복하답니다.

이영주: 저는 그냥 이 삶이 좋아요. 내가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조무사 자격증을 딴 것은 언젠가 요양원을 하기 위해서인데 지금이 행복합니다. 내가 마음 먹으면 공부할 수 있고 직업도 그렇고요. 내 마음대로 내가 생각하는 것대로 다 할 수 있는 지금이 멋있다고 생각해요. 전에는 흰머리 나고 나이 먹는 것이 싫었는데 삶은 익어가는 거라는 것을 알면서 또 성격도 많이 변했어요. 한국에 와서 삶이 유해지니까 성격도 많이 부드러워지더라고요. 나중에 요양원을 하면 죽는 날까지 어르신이 됐건 아픈 사람이 됐건 섬기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제 2의 고향 오늘은 온성 출신의 이영주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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