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자로 난 항상 행복합니다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2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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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갈현동 선정관광고등학교에서 열린 남북교사와 함께하는 스승의 날 행사에서 한 탈북자가 아코디언 연주를 하고 있다.
서울 갈현동 선정관광고등학교에서 열린 남북교사와 함께하는 스승의 날 행사에서 한 탈북자가 아코디언 연주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얼굴도 다르고 성격도 전부 다른데요. 항상 긍정적으로 현실을 받아드리고 웃으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 남한에서 아코디언 연주자로 활동하는 분인데요. 오늘은 평양 출신으로 남한생활 15년차가 되는 고정희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고정희: 공연하면 다 내가 자료 남기기 위해 사진 찍고 해요. 편집해서 유튜브에 올리고 하니까요. 내가 봐도 내가 제일 젊고 예뻐요. 이상하게 호호호…

목소리에서도 느껴지듯 너무 성격이 밝은 분입니다. 현재 남한에 사는 탈북자가 3만명이 훌쩍 넘었지만 평양 출신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고정희: 평양에 있다가 지방에 추방되다 보니까 이런 기회도 생긴 거죠. 평양에 있었으면 올 수가 없었죠.

기자: 북한에서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고정희: 밀수를 하다 보니까 무산군 화평이란 데가 있어요. 거기서 제가…

기자: 평양에서 살다가 무산으로 갔다고요?

고정희: 그럼, 고향은 평양이고 제가 추방되면서 무산으로 가서 밀수를 했으니까…

기자: 밀수라는 것이 범죄 아닙니까?

고정희: 북한에서 밀수하는 것은 여기처럼 범죄자 그런 것은 아니잖아요. 먹고 살려고 강아지, 자동차 타이어, 솔방울 가루, 노루 가죽, 곰 가죽, 금 이런 것 가지고 했죠.

정말 다양한 물품을 취급하면서 중국을 오가며 장사를 했고 1997년경 사고가 나고 맙니다.

고정희: 제가 밀수를 하면서 여러 번 붙잡혔어요. 먹고 살겠다고 중국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감옥에 자꾸 넣고 고문을 하니까 감옥에서 밤에 자면서 내가 도망을 안가고 이렇게 오는데 자꾸 나를 잡아 넣으니까 그때부터 마음이 조금 변하더라고요. 이제 내가 이 나라를 뜰 준비를 해야 하는가 보다 이 나라에선 못살겠다 했는데 그 시기가 황장엽이 남한에서 강의하고 그런 것을 중국에서 듣곤 했단 말이에요. 저도 마음이 동요 되는 거예요.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한번만 밀수를 하고 안 해야지 했는데 또 잡혔단 말이에요.

8월 15일 밭으로 새벽에 소원을 빌러 나갔는데 위기의 순간을 벗어납니다.

고정희: 그때가 옥수수가 북한에서는 한창 무성할 때에요. 중국에서는 보름이라고 명절을 크게 쇤다고 해서 8월 15일 전에 중국에 건너가서 물건을 이것저것 많이 사왔어요.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군대들한테 밥을 대충해주고 나는 낮잠을 자자 하고 아침에 밖에 나가니까 저 멀리서 승용차가 오는 거예요. 이 동네는 하루 종일 가도 승용차가 없는 데 저게 혹시 날 잡으러 오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일단 피하고 보자 하고 밭에 숨었어요. 밭에서 보니까 차가 우리 집 앞에 서는 거예요. 간밤에 뒷집 사람이 내가 중국에 갔다 온 것을 알고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가서 보위부에 알렸더라고요. 나중에 소문을 듣고 보니까요. 보위부에서 아침에 날 잡으러 왔는데 난 밭에 나갔다가 차를 보고 피한 거죠.

탈북해서도 처음에는 남한으로 갈 생각은 없었는데 상황이 점점 안 좋아져 중국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고정희: 점점 탈북자가 늘어나면서 제가 밀수도 먼저 했고 탈북도 우리동네서 제일 먼저 했었고 탈북자들이 늘어나니까 나는 편하고 하니까 중국에 살자 했는데 탈북자가 하도 많으니까 그때부터 중국에서 북한하고 합작으로 잡아내고 마을에서 신고를 해서 잡아가고 그랬어요. 나는 큰 욕심 버리고 중국에서 숨어살자 했는데 이것도 안되겠구나 너무 붙잡아 가니까. 그래서 한국 오자고 결심했죠. 사람이 자꾸 마음이 변하더라고요.

두 남매를 데리고 남한에 도착했을 때는 비로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습니다. 기대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죠.

고정희: 제가 중국에서 있으면서 한국에 대한 것을 알게 됐고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이 진짜 천국이구나 했는데 와보니까 드라마 하고 똑같더라고요. 완전히 천국이죠. 천국에서 사는 것 같고요.

북한에서는 9살 때 소년궁전에서 있다가 18살 졸업하고 평양예술단 바이올린 연주자 활동을 합니다. 그러다가 지방으로 추방 돼서는 바이올린이 아닌 아코디언을 하게 되는 데요. 남한에 가서는 다시 음악대학에서 4년을 공부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연주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고정희: 2013년부터 아코디언 강사를 지금까지 하고 있고 예술단 활동도 하고 있고 단독 공연도 하고 있어요. 앞으로 몇 년은 더 할 것 같아요.

기자: 북한에서 음악을 하셨는데 다시 남한에서 음악대학을 가셨네요. 연주법 같은 것이 차이가 많습니까?

고정희: 네, 완전 틀려요. 북한에서 배운 것으로는 여기서 연주자로 활동을 못해요. 북한 음악은 너무 강하고 가사는 수령에 대한 것이고 해서 북한 반주법으로는 연주를 못하죠. 남한 음악은 신나고 그런데 그런 것을 못 배웠죠. 그래서 아니다 싶어서 여기서 다시 배운 거예요.

탈북했을 때 어린 꼬마였던 자녀들은 어느새 장성해 엄마를 제일 잘 이해하는 친구가 됐습니다.

고정희: 딸은 시집가서 애를 낳아서 지금 10살, 7살 애가 있고 아들은 지금 나하고 살고 있어요.

기자: 아들은 몇 살이나 됐나요?

고정희: 33살

기자: 이제 장가갈 나이가 됐네요.

고정희: 요즘 애들이 돈 버느라고 장가가는 것을 뒷전으로 하는 것 같아요. 피아노는 우리 딸이 사주고 엄마 연주회 한다는데 어떻게 매일 대학에 가서 연습해 하냐면서 사주고 우리 아들은 아코디언 살 때 돈 보태주고 엄마가 좋아하는 것 하니까 너무 좋아하면서 엄마는 자기 기술로 하고 컴퓨터도 우리보다 더 잘하잖아 그래요. 음악 영상편집을 내가 다 하고 하니까 자식들이 그런 부분에 대해 엄마가 열성적으로 일하면서 그런 기술적인 것도 압도적으로 한다고 자랑스러워 하더라고.

이제 50대 후반으로 낼모레면 60입니다. 그런데 활동하는 것을 보면 청춘입니다.

고정희: 저는 그런 것 같아요. 우리 나이 또래가 갱년기 와서 아프다고 하는데 저는 아직 그런 것이 없어요. 성격이 활발해서 그런지

기자: 성격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것 같아요.

고정희: 네, 그런 것 같아요. 기분이 항상 좋으니까요.

기자: 외부 공연이 없을 때는 집에서도 연주 연습을 많이 하시나 봐요.

고정희: 네, 오늘도 지금 노래 한가지 연습해야 해서 그런 것에 신경을 많이 쓰니까 아파서 드러누울 시간이 없어요. 항상 즐거워요. 집에 있는 날도 하루 종일 아코디언 연습하고 제가 실용음악을 배웠어도 연주에 참가했을 뿐이지 안 하다 보니까 다 잊어버리고 해서 연습을 하다 보면 쉴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

남한생활에 특별하게 불편한 점은 없지만 굳이 하나를 말한다면 이겁니다.

고정희: 불편한 것은 없어요. 여기는 내가 뭘 하고자 하면 배우는 것도 자유고 그것으로 밥 벌이를 하던 일을 해도 자유니까 좋은데 사람들하고 대화가 좀 불편했죠. 평시 우리가 대화를 해도 내가 못 알아 듣고 하니까.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평생 연주자로 살아서인지 대중들 앞에서 음악을 연주할 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고정희: 공연했을 때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KBS노래자랑에 나가서 대상 받았지… 기억에 남는 순간은 영상으로 만들어서 가지고 있으니까 제 직업이 참 좋은 것 같아요.

올해는 코로나 19 확산을 막는다고 공연활동이 줄어 답답하기도 한데요. 어서 공연장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날을 기다려 봅니다.

고정희: 코로나가 올해 중에 없어지겠어요. 수강생이나 좀 늘었으면 좋겠어요. 공연을 못하니까요. 건강했으면 좋겠고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아코디언 연주자 고정희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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