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숨쉬는 것에 감사
2019.10.29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똑 같은 상황에서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천국도 되고 지옥도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모든 것은 사람 마음 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인데요. 오늘은 매사에 감사하라는 좌우명을 갖고 사는 함경남도 함흥 출신의 이미진(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이미진: 그냥 공기를 만시는 것도 고맙고 물 한모금 마시는 것도 고맙고 제가 생각했던 차가운 세상이 따뜻한 세상이구나 이렇게 느꼈어요.
북한에 살때는 그렇게 춥고 절망적이었는데 남한에 가서는 이렇게 변했습니다. 살아 숨쉬는 자체가 감사하고 행복하는 것인데요. 이 씨는 2년 전 가을 남한에 도착하기 전까지 탈북해서 중국에 살았습니다.
이미진: 2011년에 장사를 하면서 다니다 사기를 당했어요. 븍한에서 말하는 달리기 장사 그러니까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제일 북쪽과 제일 남쪽을 오가면서 돈을 버는 장사인데 마지막에 사기를 당했어요. 회사가 없어진 거예요. 혜산에서 중국 사과를 받아서 팔았는데 그 회사 사장하고 몇번을 거래 하다가 마지막에 그렇게 된 거예요. 그분이 중국에 갔다고 해서 중국에 가면 잡을 수 있다는 철없는 생각에 갔는데 결국 그때 사기를 또 당한거죠. 한 번 가니까 돌아올 수가 없더라고요.
북한식 달리기를 남한표현으로 하면 보따리 장사쯤 됩니다. 중국에서 사과를 받아다가 북한 장마당에서 팔았던 겁니다.
이미진: 겨울철에는 북한에 사과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북한 전역에 중국 사과가 판을 치죠. 사과라고 파는 것은 다 중국 사과예요. 그때 당시 사과를 사먹는 사람들은 돈이 있는 사람이예요. 저도 사과장사를 하면서 제딸에게 사과를 못먹였으니까요. 돈이 좀 많이 들어갈수록 단가가 세니까 짐이 작아요. 싼 것을 하면 같은 금액이라도 비싼 것을 팔때보다 짐이 많아져요. 달리기를 하면 짐이 작은 것이 좋죠.
중국에서 살 수도 있었지만 결국 인간답게 그리고 당당하게 살기 위해 남한행을 합니다.
이미진: 중국에서 신분증이 없으니까 살아도 사람이 아닌 거예요. 딸은 커가는데 유치원에서 친자여행을 가는데 엄마가 따라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때 느낀 것이 북한에 딸 하나 버리고 왔고 중국에 또 딸이 있는데 그딸에게도 아빠 이름, 할머니 이름 다 알려줄 수 있는데 엄마 이름만은 알려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때 사람이 돈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느꼈어요. 그래서 신분증을 하려고 한국행을 결심했고 솔직히 한국와 와보니까 중국에 다시 못가겠더라고요.
남한에 가서 당당하게 신분증을 만들고 보니 자신이 북한에서 배우고 생각하던 차가운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중국에서도 방송을 통해 남한사회를 알긴 했지만 그냥 방송일뿐 사실이라고 믿지 않았는데 직접 경험을 하고는 마음이 변했습니다.
이미진: 처음 한국에 와서 느낀 것이 자꾸 만나는 사람마다 안아주시더라고요. 북한은 안아주는 문화가 없잖아요. 부모가 자식을 안아주는 것도 없는 세상이라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처음엔 밀어냈어요. 왜 불안하게 자꾸 나를 만져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어느날 길을 가다가 건널목에 섰는데 차가 먼저 서더라고요. 먼저 가라고 손짓을 하더라고요. 그것이 너무 고맙더라고요. 또 언제 한번은 차가 급히 오기에 길에 들어 섰다가 물러서면서 먼저 가시라고 손짓을 했더니 기사분이 인사를 하시더라고요. 그때 제 마음이 너무 따뜻한 거예요.
40대 초반에 시작했던 남한생활. 의사의 암 선고를 받고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도 있었지만 수술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이미진: 하나원에서 나오는 날에 의사선생님이 암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수술을 했는데 많은 검사를 하잖아요. 최첨단 설비로 각종 검사를 했는데 그 비용이 엄청난 거예요. 그런데 저는 한푼도 안내는 거예요. 그것을 보면서 눈물이 나는 거예요. 제가 이몸으로 북한에 있었더라면 아니면 중국에서 이 상황이었다면 과연 살 수 있었을까 생각하니까 너무 고마운 거예요. 저는 여기와서 지금까지도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요.
다행히 암은 초기에 발견됐고 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퇴원을 하고 나와서는 바로 학원에 갔는데요. 뭔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한 준비였고 중국어 통역 자격증을 따는 도전이었습니다.
이미진: 배를 웅켜잡고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일주일만에 중국어 자격증 시험을 봐서 자격증을 따고 집이라고 보름만에 중국 집에 갔어요. 그때는 중국에서 떠나서 몇 개월이 걸려서 왔으니까 딸을 보러 간거죠. 가서는 중국남편하고 결판을 짓고 나는 한국에서 살고 싶다. 중국에서는 못산다 하고 나왔죠.
신분증만 취득하면 중국에 돌아간다는 마음으로 남한에 갔고 중국어 통역 자격증을 땄을 때는 벌써 집떠난지 10달이 됐습니다. 딸도 보고 싶었고 집이 그리워서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갔지만 이 씨를 그곳에 머물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시 한국에 돌아가 직장을 찾습니다.
이미진: 저는 지금 한국에서 중소기업청 산하 조합 사무실에서 일합니다. 조합 산하에 회사가 300여개 있는데 제조업 회사라 재료 설비를 중국에서 사들여 오는 일이 많아서 원래는 사무직 사원으로 일했는데 무역통역까지 겸하고 있습니다.
이 씨는 북한에서는 농업대학을 나왔습니다. 중국에서도 3년만에 말을 배워서 장사를 했고요. 이 씨 불가능하고 어려워 보이는 일이라도 절심함이 있었기 때문에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현재 남한에서 회사생활도 주변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면서 하고 있습니다. 남한생활이 몇 년 되지 않았지만 조금더 나은 내일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이미진: 저보고 많은 분들이 너무 열심히 산다고 합니다. 낮에는 회사가고 사이버 대학 2학년인데 시간이 있으면 또 학원 다니고 하거든요. 북한에 있을 때 배우지 못한 것을 여기서 다 배우고 싶어서 하는 것이거든요. 어떤 분은 나이 60살이 넘어서도 박사원에 다니고 그러더라고요. 한국은 자격증이나 뭔가 배우는 것이 경제활동을 위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성숙을 위해 많이 배우시더라고요. 그런 것에 감동을 받아서 저도 열심히 살죠.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묻는 기자의 질문에는 이렇게 답합니다.
이미진: 사실 처음에는 계획도 있었어요. 5년 뒤에는 뭐가 될꺼다. 10년 뒤에는 뭘 할꺼다 했는데 암수술을 받으면서 그 생각을 접었어요. 계획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내일 뭔일이 있을지 모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미래는 오늘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지만 과거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일 그래서 자신이 경험한 아픈 과거를 지금도 겪고 있는 다른 탈북여성들을 생각하며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봅니다.
이미진: 육아원을 하고 싶어요. 내가 못 데려온 딸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내가 부모들에게 버림을 받거나 사정이 있어 혼자가 된 아이들을 돌봐주고 싶어요. 중국에는 탈북자들 자식들이 버림받은 아이들이 많거든요. 그것이 내 인생의 목표고 사명인 것 같아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이미진(가명) 씨의 남한생활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