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한국에 사는 탈북자가 3만명을 훌쩍 넘은 것이 오래 전 입니다. 남한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6년 11월 중순을 기점으로 남한입국 탈북자의 수가 3만명이 넘었는데요. 이들 중에는 탈북 해서 중국이나 제 3국의 생활을 거치지 않고 남한으로 직행하는 사람도 꽤 있습니다. 오늘은 남한생활이 3개월밖에 안 되는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최미나(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최미나: 저는 중국 거쳐서 한 주 있다가 바로 왔어요
최 씨가 고향을 떠난 것은 지난해 11월입니다. 꼭 1년 전인데요. 브로커를 통해 국경을 넘고는 제3국을 경유해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남한의 조사기관과 사회정착교육시설인 하나원을 거쳐 거주지에 아파트를 받아서 본격적인 남한생활을 한 것은 3개월밖에 안됐습니다. 1년 전 최 씨가 북한을 떠나기 전 상황부터 들어봅니다.
최미나: 힘들었어요. 중국에서 제품을 안 내보내면 먹고 살기가 좀 힘들었어요.
기자: 장마당이 잘 작동을 안 했던 겁니까?
최미나: 우선 개인 장사를 못하게 하거든요. 하는 사람은 국가에 뭔가 내는 사람만 하고요. 개인장사란 것이 쌀 팔고 옷 팔고 하는 것은 하는데 그것도 국가에 뭔가 내야 할 수 있고 큰 장사는 못해요.
기자: 무역을 하는 것은 어려워도 장마당에서 하는 것도 통제가 있었나요?
최미나: 우리가 숙제를 해야만 그 장사도 하거든요.
기자: 그러니까 뭔가 뇌물을 받쳐야 가능했다는 말인데요. 북한을 떠나기 직전까진 어떻게 생활하셨나요?
최미나: 저는 여기 올 때까지 여름에는 농사 짓고 했어요. 부모가 없는 고아들이 사는 집에서 살았는데 여름에는 농사 짓고 봄에는 약초 캐고 가을에는 나무 해서 팔고요. 나무도 젖은 나무는 안 되고 마른 나무 찾아서 팔고요.
20대 중반의 최 씨는 자신이 살았던 곳은 무산에서도 시골이었는데 잘사는 사람은 먹고 살만 했지만 기본적인 생활조차 어려운 사람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소위 말해서 빈부의 격차가 심했다는 건데요. 건강한 사람은 부족하나마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건강에 문제가 생길 경우 마땅한 대책이 없다는 겁니다.
최미나: 그렇게 하면 하루 세끼 먹는 것은 보장 되는데 북한도 부지런해야지 먹고 살지 그렇지 못하면 못 살죠. 그런데 여기서는 팔이 없다든가 다릴 다친 사람도 나라에서 잘 해주지만 우린 그런 사람들은 일을 못하니까 먹고 살기가 힘들죠.
최 씨는 현재 자신의 상황이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1년전만 해도 상상활 수 없는 생활을 누리고 있기 때문인데요. 게다가 국경통제가 심할 때 도강을 해서 남한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미리 알았더라면 쉽게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최미나: 저는 진짜 한국에 올 생각을 못했어요. 엄청 힘들게 살다가 갑자기 브로커가 제게 와서 엄마가 살았다고 했거든요. 저는 엄마 얼굴도 모르고 엄마도 제 얼굴을 모르거든요. 낳자마자 저는 엄마하고 헤어졌어요. 저는 아빠 엄마 다 사망한 줄 알고 부모 없는 자식 집에 가서 살았는데 갑자기 작년에 엄마가 살아 있다고 하니까 엄마 때문에 왔죠.
기자: 엄마가 찾는다고 하니까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그 사람을 따라 나섰던 거군요
최미나: 네, 저는 엄마를 보고프니까 엄마가 어디 있든 상관없이 엄마가 있다니까 가고프다. 엄마의 사랑을 받고팠으니까요.
기자: 그러니까 남조선 즉 한국에 사는지 모르고 왔다는 말이네요.
최미나: 네, 그래서 진짜 많이 놀랐어요.
20년을 넘게 살아온 고향 땅이었지만 부모 형제가 없는 천하 고아인줄만 알았는데 정말 갑자기 찾아온 반가운 소식으로 삶이 한 순간 변했습니다. 그리고 긴 여정을 거쳐 시작된 남한생활.
최미나: 거리가 엄청 멋있고 길가에도 텔레비전이 보이는 거예요. 여기선 아무데나 가도 텔레비전을 건물에 달아놓은 거예요. 여기선 아무 곳에 가도 텔레비전에 많은 거예요. 우리 북한은 훔쳐갔을 텐데 여기는 건물에 텔레비전을 달아놓지? 여긴 도둑이 없나 보다 도둑이 없는 나라도 있을까? 하는 궁금한 생각이 있었어요. 그리고 전기요. 새벽에도 길에 불이 켜있으니까 신기했어요. 우리는 전기도 못 보거든요. 그런데 여긴 전기가 흔할 정도로..
차를 타고 다니면 수 십층 높은 건물 벽면에는 옥외 광고판이 설치돼 있고 건물 벽면에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뉴스나 광고를 하는 모습을 쉽게 마주치게 됩니다. 그리고 밤거리에도 사람이 없는 거리를 환하게 밝히고 있는 가로등은 태어나 처음 보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신기했습니다.
최미나: 전기도 있긴 있는데 그것도 돈이 있어야 하거든요. 돈이 없는 사람은 전기도 못 봐요.
기자: 무산에 살 때는 전기는 어떻게 해결 하셨나요?
최미나: 배터리요. 전지 발동기 이런 것으로요.
모든 것이 달라진 남한의 생활. 아직까지는 혼자 외출하는 것이 걱정입니다. 길도 생소하고 어딜 가나 차와 사람들로 번잡스럽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의외로 보통 사람들이 걱정하는 돈에 대해서는 아주 편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미나: 우리는 북한에서는 돈을 아껴 쓰게 되는데 여기서는 돈이 하나도 없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북한에서는 돈이 없으면 못 살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를 좀 해도 돈이 생기니까 저는 돈에 대해서는 걱정이 없을 것 같아요. 북한 하고는 정말 달라요.
기자: 현재 일을 하는 일이 있나요?
최미나: 아니요. 하지만 내가 노력하면 할수록 돈이 생기잖아요. 북한에서는 어디 가서 일해도 돈을 안 줘요. 그런데 여기서는 한 시간만 일해도 돈을 주니까요.
그리 긴 시간이 아닙니다. 북한에서 작년 이맘때는 날이 추웠어도 일하다 보면 땀으로 옷이 젖을 정도였는데요. 솔직히 이제는 시간은 많은데 뭘 해야 할지 누구도 뭘 해야 한다고 지시하는 사람도 없고 모이라고 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 이상할 뿐입니다.
최미나: 지금쯤 우리는 농사를 했으니까 바빴죠. 가을에 추수한 것 끌어 들이고 김치를 엄청 많이 하거든요. 진짜 11월 달에는 진짜 바빠요. 김치를 해도 1톤씩 해야 하지 농사한 것 정리하자면 겨울 두 달, 12월까지는 금방 지나가요. 그것 다 하고 나면 새해거든요. 그런데 여기 와서 너무 편안하니까 그냥 사지가 아파요.
기자: 이제 날이 꽤 쌀쌀해 졌는데요. 남한에 가서 옷은 좀 사셨어요.
최미나: 옷 같은 것은 사죠.
기자: 겨울 옷이며 목도리, 장갑 이런 겨울 맞이 준비를 하는데요.
최미나: 그런데 생각보다 그렇게 추울 것 같지 않아요. 북한은 엄청 춥거든요. 지금 11월 되면 눈이 오고 동복을 입지 않으면 나가질 못하는데 여기선 동복을 안 입고 치마를 입고 다니니까요.
아직은 정확히 뭘 하고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인데도 보는 것마다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관심을 가지다가도 자세한 속내용을 알게 되면 바로 또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최미나: 지금 하고 싶은 것은 배우를 하고 싶어요. 연예인이요. 취미는 거기 있는데 거기 연예인의 얘기를 들어보면 힘드니까 하지 말라고… 제가 텔레비전을 보면 엄청 재미있는 거예요.
기자: 북한에서 선전대 이런 것을 하셨나요?
최미나: 그런 것은 아니고 북한에서는 그런 꿈을 못 꿨는데 여기서 텔레비전 보고 사람들이 행동하고 하는 것을 보니까 직업은 엄청 많으니까 갑자기 희망이 달라지는 거예요. 꿈이 달라지는 거예요. 저도 그쪽으로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거든요.
북한에서 바로 남한으로 직행해 모든 것이 서툴 수밖에 없는 최 씨. 매일 매일 하나씩 남한생활에 대해 알아가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남한생활이 3개월밖에 안됐다는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최미나(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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