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처럼 살고싶다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9.01.01
freedom_nk_kim_b 워싱턴DC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회견을 하고 있는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연합뉴스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인권운동가이자 시인인 탈북자가 있습니다. 바로 자유북한방송의 김성민 대표입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고 죽을 고비도 몇 차례 넘기면서 남한에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는데요. 오늘은 김성민 씨의 남한생활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성민: 제 좌우명은 시처럼 살자 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시를 열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한생을 살면서 시처럼 아름답고 열정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나는 갖고 있습니다.

최소한 김성민 씨가 살고 있는 남한에서의 인생은 변함없는 목표를 향해 묵묵히 걷는 수도자를 연상케 합니다. 왜 그러냐고요? 기자가 지난 2006년 1월 김성민 씨와 전화회견을 했을 당시 방송내용 잠시 들어보시죠.

김성민: 저는 끝까지 자신을 평가하라면 시인이라고 평가하고 있고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하고  누가 묻는다면 좋은 시집 한 권 내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있지만 저는 시인이기를 원하고 있고 꼭 좋은 시집 한 권이라도 내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다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보자. 그래서 시인도 되고 싶고 자유북한방송을 통해 북한 사람들에게 자유세계의 목소리도 전하고 싶고요. 새해에도 이런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도 김성민 씨는 10년이 훨씬 지난 과거에 기자에게 들여줬던 말을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사람은 보통 살면서 조금씩은 삶의 목표점이 변하게 되고 그에 맞춰서 살게 되는데 적어도 김 대표의 생각은 남한정착 초기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어 보입니다. 바로 그가 삶의 목표로 하는 시인의 삶과 북한인권개선을 위해 남은 인생을 건다는 점에서는 말입니다.

김성민 씨는 탈북 당시 북한군 212군부대 예술선전대 작가로 계급은 대위였습니다. 자강도 희천시 전평노동자구에서 태어나 청소년시절 평양에서 10년동안 대동문 인민학교와 연광고등중학교를 다닌 뒤 17살에 군에 입대했고 소위 말하는 엘리트의 길을 걷다가 탈북하게 됩니다.

김성민: 두 번 탈북을 했는데 처음 탈북은 1996년에 남한에 사는 삼촌을 찾기 위해 편지를 쓴 것 그리고 부대에서 개성학생소년 궁전에 있는 악기를 훔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여파로 지시를 내렸던 선전대 대장과 작곡가는 출당 제재를 당했고 그때 나는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바람에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남조선에 가서 대북방송을 통해 이야기를 시원하게 해보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탈북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약 10개월동안 생활하다가 한국으로 오기 위해 밀선을 탔는데 그 과정에 중국공안에 체포가 됐고요. 강제북송을 당했다가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면서 두 번째 탈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탈북자가 된거죠.

하루아침에 당에 충성하던 군인에서 변절자로 낙인찍힌 뒤 선택한 탈북. 괴로움은 시로 승화 됐고 시는  김 대표를 지켜주는 등대와 같은 존재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영향은 김 대표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됐습니다.

김성민: 저의 아버님의 경력을 보면 해방 후 첫 시인으로 등단을 했고요. 첫 작가동맹 함북도 지부장을 하셨고요. 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시분과 위원회 위원장을 하셨고요. 김일성 종합대학 교원도 하셨고요. 제가 기억하는 시인 김순석 저의 아버님은 참 평범한 시인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미발표 작품들을 어느날 쭉 볼 수 있었는데요. 향토적인 시인 그리고 서정적인 시인 …

김성민 대표는 남한에 입국 한 후 지난 2003년 8월 계간 문예지인 자유문학에 촌놈 주제 등 시 12편을 발표 하면서 시인으로 문단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 후 1년 뒤 김 씨는 고향의 노래는 늘 슬픈가 라는 제목으로 60여편의 시를 모아 시집을 냈습니다.

김성민: 고백이라는 시입니다. 떠나던 나를 위해 아무도 울어준이 없는 곳이지만 그곳은 나서 첫걸음 익힌 곳 못다한 나의 사랑일지 모릅니다. 이런 머리시를 썼는데요. 어짜히 저 같은 경우는 고향을 떠난 사람이니까요. 고향에 대한 생각 여기에 사상이 깃들이는 없겠죠. 그냥 아무것에도 구애되지 않고 내생활과 감정을 그대로 풀어가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진화해가는 모습은 여느 다른 탈북자가 경험하는 불안과 외로움을 견디고 난 후였습니다. 남한에 첫발을 내딛었을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김성민: 저는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한국에 친척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대주택에 처음 나와서 아무 가구도 없는데 맨바닥에 얇은 모포 한장을 깔고 누워서 잠이 안왔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 아마 이런 기억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 낯선 곳에 홀로 왔구나. 북한에 형제들이 있구나, 북한에 부모님의 묘소가 있구나. 나만 혼자 왔구나 하는 자괴감과 공허함이 가슴이 꽉 응어리처럼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초기에는 정말 꿈은 고사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라고 정말 막막한 생각밖에 없고요. 한  6개월 지나면서 도전해 볼만한 세상이라는 생각을 서서히 했고요. 그리고 라디오 방송국 작가를 한 3년 했어요. 그러면서 여기서 내가 작가로서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문학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구나 하고 조금씩 꿈을 키워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30대 후반에 시작했던 제2의 인생.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북한과 너무나 다른 세상이란 것에 문뜩문뜩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성민: 제가 본 남한은 세상은 자기 중심의 사회. 북한과 달리 대통령의 생일은 알려고도 하지 않는 집단 그리고 당원증 번호와 총기번호를 외워야 하는 북한과는 달리 신용카드와 이메일의 비밀번호에만 익숙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남조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독한 개인주의 속에 애국심도 깃들어 있다는 것을 날이 갈수록 느끼고 있습니다. 최근 늘어나고 있는 태극기 집회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더 깊이 하고 있습니다.

김성민 씨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고 탈북자들의 친목단체인 탈북자동지회  회장을  거쳐 현재 자유북한방송 대표로 있습니다. 방송은 지난 2004년 4월 20일 개국식을 갖고 북한관련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늘 대북방송을 하면서 고민하는 것이 어떻게 하면 보다 솔직하고 설득력있게 남한의 현실을 북한주민들에게 알려줄 것인가 하는 것이라는데요. 최근 또 동영상 방송을 하면서 한층 진화한 모습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김성민: 저희들은 유투브 방송의 제목을 눈으로 보는 라디오라고 정했습니다. 그래서 라디오 녹음은  대북방송에 사용하고요. 유투브는 주로 남한사람이 보니까 남한사람에게도 북한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사실 수술과 항암 치료를 정신없이 받다가 눈을 떠보니까 세상이 바뀌어있더라고요. 초기에는 나까지 할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유투브 방송이 애국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존 매체와 달리 남한의 애국시민들이 유투브 방송에 많이 참여 하고 또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여기서 북한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2016년 암투병을 통해 다시 한 번 고난을 겪고 일어선 김성민 씨가 맞이하는 새해는 어떨까요?

김성민: 꼭 취미라고 말씀드리기 뭣하지만 저는 요즘 낚시에 재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가고 있습니다. 주변사람들이 건강이 중요하고 오래살아야 하지 않나 하는 얘기를 합니다. 정말 오래 사는 길은 산에 들어가서 약초 캐고 글도 쓰고 하는 것이지만 저는 성격상 그렇게는 못살겠다는 생각을 하고 저는 사실 새해를 맞을 때 마다 큰 소망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늘 해오던 생각이지만 방송국을 직장이라 생각하지 않고 탈북자로 탈북자 답게 탈북자로 사는 삶에 올인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자유북한방송의 김성민 대표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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