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통신] "북한 인권운동이 삶의 동기" 폴란드 출신 여성 호사냑 씨

남한의 대표적인 대북인권지원 단체인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폴란드 출신의 젊은 여성이 헌신적으로 5년째 묵묵히 일하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화제의 주인공은 이 단체에서 북한 인권과 관련한 국제적 협력과 연대 업무를 맡은 요안나 호사냑 씨입니다.

남한의 대북인권지원 단체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5년간 일하고 있는 폴란드 출신의 요안나 호사냑(Joanna Hosaniak) 씨.
남한의 대북인권지원 단체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5년간 일하고 있는 폴란드 출신의 요안나 호사냑(Joanna Hosaniak) 씨. (RFA PHOTO/변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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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냑 씨는 남한에 정착한 탈북 청소년 가운데 미래 지도자감이 될 만한 인재를 키우겠다는 야심 찬 꿈도 키우고 있습니다. 서울통신에서는 '북한인권 운동이 삶의 동기'라고 말하는 호사냑 씨에게서 북한 인권 활동가로 변신하게 된 사연에 관해 들어봅니다.

서울 중심부인 서대문 교차로 근처에 있는 허름한 건물 3층에는 대북인권지원 단체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이 입주해 있습니다. 사무실 공간은 그리 넓지 않지만, 이곳에는 윤현 이사장을 비롯한 10여 명의 대북인권 활동가들이 불철주야로 북한인권의 개선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특히 이 사무실 한편 구석에는 푸른 눈을 가진 외국인 여성이 종종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하며 벌써 5년째 근무하고 있어 방문객의 눈길을 끕니다. 화제의 주인공은 북한 인권의 참상을 국제사회에 고발하고 북한인권의 개선을 위해 국제 비정부 기구들과 연대 작업을 이끄는 요안나 호사냑(Joanna Hosaniak) 씨입니다.

호사냑 씨는 지난 94년 바르샤바 대학 한국어 문학과에 진학하기 전까지도 남북한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북한 교수에게서 한국말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북한 교수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북한으로 소환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당시 한국어 문학과 학생 5명이 교수를 다시 보내달라고 탄원하는 편지를 폴란드 주재 북한 대사관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탄원서에 대해 북한 대사관 측은 '그자가 실종됐다. 혹시 어디 있는지 모르느냐?'면서 오히려 발뺌하는 식의 태도를 보였고, 그 일 때문에 호사냑 씨는 난생처음 수수께끼와 같은 북한에 대해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호사냑: 그래 이런 생각을 해보았어요. 당시 제가 한국어과를 다닐 때는 폴란드가 이미 자유주의 체제로 전환한 뒤였어요. 그래서 자유 폴란드에서 살고 있으니까 도대체 북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봐야 봐야겠다고 말입니다. 남한에만 초점을 맞춰선 안 되겠다고 말입니다. 그때부터 전 북한에서 실제로 탈출한 주민들이 있는지 조사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북한 문제에 관해 눈을 뜬 호사냑 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진로를 고심하다가 일단 폴란드 주재 남한 대사관에 취직해 2003년까지 근무했습니다. 남한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는 남북의 분단 상은 물론 북한의 열악한 인권 상황에 관해 자세히 알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과거 동유럽의 인권 참상을 고발하고 인권 개선을 위해 혁혁한 전과를 올린 헬싱키 인권재단에서 활동가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응모해 20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당당히 합격했습니다.

호사냑: 헬싱키 인권재단은 들어가기가 무척 어려운 곳입니다. 여기선 판사나 간수, 언론인, 변호사, 의사 등에게 인권 문제에 관한 훈련을 하는 프로그램에 있는데요, 이걸 담당하는 자리에 20명이 지원합니다. 전 면접관들한테 여기에 북한인권 프로그램은 없지만, 채용하면 북한 인권문제에 집중하고 싶다는 뜻을 말했습니다. 만일 올해 안 되면 내년에도 응모하고, 그래도 안되면 그다음 해에도 응모하겠다고 했죠. 나중에 면접관들이 제 의지가 너무 강해 뽑았다더군요.

호사냑 씨는 헬싱키 인권재단에 구직을 한 동기를 자신의 성장 배경에서 찾습니다. 과거 냉전 시절 구소련의 압제 밑에 시달린 폴란드의 시민으로서 같은 공산체제였으면서도 비슷한 점보다는 오히려 차이점이 더 많은 북한을 좀 더 이해하고, 도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당시 폴란드에 북한인권 전문가가 전혀 없었다는 점도 그의 선택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호사냑: 폴란드도 체제가 변했다면 북한도 나중에 변할 수 있고, 그러면 저도 도움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나라든 체제 변화를 겪고 나면 극적인 변화의 시기를 거칩니다. 그런데 체제가 바뀌고 나서도 인권을 남용하는 사례는 많이 생기지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헬싱키 재단에는 이런 걸 대비해 인권 문제를 훈련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체제 전환에 있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체제가 바뀌어도 자신들이 권력층에 의해 인권 침해를 당하는 줄도 모르고, 알아도 대처 방법을 모릅니다. 법이 변화를 따라가질 못하는 거죠. 그래서 만일 북한도 체제가 변하면 저도 북한에 가서 판사나 언론인 등에게 인권 문제의 중요성에 관해 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헬싱키 인권재단에서 약 1년간 인권문제로 씨름하던 호사냑 씨는 지난 2004년 3월 바르샤바에서 제5회 북한인권난민 국제회의가 열리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습니다. 이 회의를 주관한 북한인권시민연합의 윤현 이사장의 권유로 몇 달 뒤엔 아예 이 단체가 있는 남한으로 일터를 옮겼기 때문입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부모는 과거 공산치하에서 갖은 어려움을 겪었던 분이기에 그의 남한행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지했다고 합니다.

북한인권시민연합에 새 둥지를 튼 호사냑 씨는 곧바로 국제적으로 북한 인권과 관련한 참상을 조사해 기록하고, 또 이를 널리 알리는 업무를 도맡았습니다. 바르샤바 대학의 학생 시절부터 헬싱키 인권재단의 활동하기까지 지난 9년간의 경험은 그가 이 단체에서 일하는 데 귀중한 밑거름이 됐습니다. 해마다 열리는 북한인권국제난민 회의를 실무선에서 준비하기도 하고, 각국 대사관과 외교 사절과 접촉해 북한인권을 적극적으로 제기할 수 있도록 로비를 펼치는 일도 그의 몫입니다. 특히 올해 12월에는 유엔이 각국별 인권상황을 검토하기 위한 보편적 정례검토의 대상으로 북한을 심의하게 돼 있어 북한인권 침해의 사례를 조사해 기록하고, 관련 기관에 홍보하는 일 때문에 눈코 뜰새 없이 바쁩니다.

호사냑 씨는 지난 5년간 일을 해오면서 보람도 많았지만, 좌절감을 느낄 때도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지난 2004년 납북된 진경숙 씨 사건은 지금도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관과 비정부 기구를 통해서 진 씨의 행방을 확인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어도 북한 당국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별 진전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탈북자인 진 씨는 지난 2004년 8월 중국으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북한과 중국 국경 지대에서 북한 측 공작조에 의해 납치됐습니다. 다행히 남편은 납치를 모면했지만 5년이란 시간이 흐린 지금까지도 진 씨의 행방은 묘연합니다.

호사냑: 지금 진 씨가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진 씨 모친이 소식을 알아보려 노력했는데, 혼란스런 소식만 들린다고 합니다. 하도 구타를 당해 의식불명인 채로 평양으로 압송됐다는 소식도 있고,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도 있다는 거예요. 우리와 같은 활동가 단체의 장점은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살아있다고 가정하고 북한 당국에 계속 진 씨의 행방을 캐물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엔 인권기구를 통해 문의할 때마다 북한 측은 ‘그런 사람은 없다. 이건 국제사회가 만들어낸 음모’라는 식으로 강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게 개인적으로 좌절된 경험입니다.

호사냑 씨의 좌절감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북한의 참혹한 인권상황이나 탈북자의 실상을 알려주는 내용이 공식적인 교과 과정으로 나와 있지 않은 것도 그렇고, 소위 남한의 진보 세력이라는 사람들이 남한의 인권문제에 관해선 떠들어도 북한 인권문제에 관해선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특히 그는 얼마 전 진보적인 학생을 만나 탈북 난민 문제를 꺼냈다가 그 학생에게서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야유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호사냑 씨는 나름의 소박한 꿈과 목표가 있기에 포기하진 않습니다. 현재 서강대 박사과정에 있는 그는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 그리고 북한에 대한 남한 국민의 편견과 태도가 남북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주제로 논문을 준비 중입니다. 또 논문을 끝내면 좀 더 큰 목표를 위해 유럽으로 활동 무대를 옮길 생각도 있습니다. 그 목표란 남한에 정착한 젊은 탈북자들을 통일 한국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야심 찬 계획입니다.

호사냑 : 남한에 사는 북한 청년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일부 유럽 기관과도 연락하고 있는데요.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이들을 체코나 폴란드로 초청해 이런 나라들이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가를 직접 보여주고 싶습니다. 현재 남한에 사는 북한 학생, 특히 지도자감이 될 만한 젊은이에게 기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과거 폴란드는 체제 변화를 거칠 때 그런 젊은이에게 투자했습니다. 장차 리더가 될 학생들에게 투자하는 게 무척 중요합니다. 이런 지도자감의 탈북자들에게 투자하는 게 무척 중요하다고 봅니다. 북한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들은 다시 북한에 가고 싶어할 겁니다. 실제로 사석에서 이들에게 ‘남한 사람처럼 느끼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아니라고 답합니다. 상황이 허락하면 다시 가고 싶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장차 남북한이 통일되고 나서 활용할 수 있는 엘리트 ‘통일 일꾼’을 키우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는 겁니다. 또 그런 소박한 꿈은 조국 폴란드가 실제로 경험한 데서 나왔기 때문에 절실하기도 하다는 게 호사냑 씨의 설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