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길 : 북한 방문 미국 동포,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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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이원희 leew@rfa.org

남측의 구호 물품을 실은 남북정기 화물선이 연일 북한 남포항으로 향하고 있지만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 이산가족 들은 애가 탑니다. 지난 1990년 형님을 만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던 미국 내 이산가족 조 병선 씨는 그때 후로 지금까지도 북한의 형편이 하나도 나아지지 않고 홍수와 식량난은 더욱 심해지고 있기에 초조함이 더합니다. 조병선 씨는 당시 가족들을 만난 사연을 늘 가슴 한편에 품고 살았지만 이제는 말 할 수 있다며 얘기의 실마리를 풀었습니다.

조병선: 그때 북한의 생활상이 아주 제가 보았을 때 아주 절망적 이었는데... 식량이 부족에 쩔쩔 매는 것을 제가 보았어요. 아이고 말도 못하게 불쌍해요. 그 때는 김일성 살아 있을 때고 그런데 그 후에 훨씬 더 나빠졌으니까.

지난 60년대 미국으로 온 조병선 씨는 형님과 헤어진 지 40여년이 흐른 뒤 1997년 김일성 주석이 살았을 당시 형님을 만나기 위해 북으로 갔습니다. 지금처럼 평양 어느 호텔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형님 가족들이 살고 있는 마을로 직접 가서 만난 것입니다.

조병선: 제가 갔다 온 것이 벌써 17년 전 이거든요 그때만 해도 거의 남북 교류가 없을 때 갔다 왔는데 정말 경제가 아주 엉망이라 먹고 살기도 힘들고 그런데 그 후로 사람들이 굶어 죽을 정도가 되었으니...

그런데 올해 다시 남한 언론들이 북한의 큰 홍수 피해 소식을 전하고 있어 일반 주민들의 하루 3끼가 걱정된다며 그동안 못 한 얘기를 이제는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조병선: 거기에서 나서 자란 죄밖에 없는 사람들이 굶는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픈지.. 사람은 우선 먹여야 되니까 입고 먹고 기초 생활을 먼저 해야 하고 그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요. 인프라가 거의 제로 에 가까우니까 도로 전력 뭐든지 부족하고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17년 전 가족을 만났을 때 조 씨는 남한 얘기도 세계 돌아가는 형편도 모두 전했지만 다른 부분은 의심을 하면서도 그럴 수도 있구나 하는 긍정의 표시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대 믿을 수 없다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고 하는데...

조병선: 남한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어서 뚱뚱해 져서 살 빼는데 돈을 들인다 못 빼서 난리다 고 했더니 그것이 무슨 말인지 세상에 그런 일은 상상조차 안했기 때문에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 사람들 에게는... 그런 것은 저기 경험도 못하고 상상도 해 본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당시 북한 어디서나 뇌물이 만연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느 사회나 뇌물 부정부패가 있을 수 있지만 북한의 경우는 너무 하다 싶을 정도로 또 직접 당했습니다.

조병선: 우리가 보면 남한에 부정투성이고 모두 뇌물인 것 같은데 북한은 남한의 몇 십 배가 더하면 더하지 훨씬 더하거든요 아주 자잘 구래 한 것 까지 뇌물을 주어야 하는 나라니까 남한에서는 큰 건이나 뇌물을 주지 기차표를 산다거나 이런 은 뇌물 안주지 않아요. 거기는 모든 생활 자체가 뇌물을 주어야 배급을 받을래도 뇌물을 주어야 하고 기차표를 사려고 해도 뇌물을 주어야 하고 통행증을 받을래도 다 그러니까 참 세계에서 가장 뇌물이 성한 나라가 북한인 것 같아요.

그는 이어 북한도 교육열이 대단하다는 소식을 알고 있지만 17년전 에도 좋은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역시 뇌물이 큰 작용을 한 것도 지금과 마찬 가지로 변하지 않고 있는 것 중의 하나라고 꼽습니다.

조병선: 남한에서는 학교시험에 과외를 하던 자기가 시럼을 잘 보면 좋은 학교 가지 않아요. 그런데 북한은 대부분이 뒷거래가 있어야 좋은 학교를 가니까 정말 수재가 아니면 정말 좋은 대학에 못 간다고 그래요 그러니 독재에다 무어든지 모라라니까 관리들도 자기 지위를 이용해서 뇌물을 긁어모으는 겁니다. 자기 네 들도 월급만 받고는 살기 힘들지 않아요? 그러니까 모든 생활이 다 그런 식으로 돌아가요.

조병선 씨는 그때 형님가족을 만나고 온 후로는 통일이 되거나 자유롭게 왕래 할 수 있기 전에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하면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조병선: 그런 선언을 하고 갔다온 후 개인적으로 인편을 통해 돈은 많이 보냈어요 편지는 계속 오고 돈을 계속 보냈어요.

하지만 남북관계가 경색 되었을 때 미국에서 북한을 방문했던 이산가족들 에게 모두 같은 내용의 전화가 왔던 겁니다.

조병선: 남쪽에서 북한으로 돈 들어가는 것이 막히고 금강산 관광도 중지되고 그런 적이 있었어요. 미국에서 왔다 간 가족들을 중국으로 내보내서 여기다 전화를 하게 하더군요 자기가 나온 것이 아니라 데리고 나와서 전화를 하는데 똑 같은 얘기를 우리 친구도 자기 배 다른 동생이 우리 가족들이 하던 것과 똑 같은 말, 그리고 돈 얼마를 보내달라는 것도 똑 같은 말을 하더라구요. 나라에서 신의주에서 다리만 건너 단둥에서 여기에 전화 하도록 했던 겁니다.

얼마나 어려우면 이런 편법을 쓰나 싶어 안 되기도 하고 더욱이 가족들이 안쓰럽다며 그래도 지금 같은 개성공단 사업이 하나의 모델로 잘 운영이 되어 이런 제도를 더 많이 늘려 갈 수 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조병선: 그 사라들에게 직업을 주고 수입이 생기고 그러면서 그 쪽에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남한도 이득을 보니까 예전 60년대 일본사람들이 한국에 공장을 세웠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공장에 다니던 사람들이 그나마 저 임금 이지만 그 공장에서 먹고 살았어요 그것도 없으면 직업이 없으니 북한 사람들한테는 직업 만들어 주고 수입이 생기면서 물건이 들어가고...

그러면서 홍수가 크게 난 이런 비상사태에서는 우선 먹을 것 만이라도 남측이 부담 해야 한다고 강조 합니다. 남한의 경제력으로 보아서 능히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조병선: 북한에서 농사짓는 것 에다 더해서 배 안고플 정도로 먹이는데 당시 국제 곡가로 제가 계산을 해 보았더니 한 10억 달러 들더라구요. 한국에서 지금 수출 몇 천 억 달러 하는데 한국에서 북한 사람들 배 안고프게 먹이는 것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혈육이 있기에 걱정의 끈을 놓지 못하는 조병선 씨는 한 가지 북한 측에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의사인 조병선 씨는 북한에 제3병원을 둘러보고 와서 역시 북한은 일반인 들이 아닌 특수층을 위해 모든 일을 추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을 했던 겁니다.

조병선: 미국에서 각 병원에 보면 MRI, 캐스캔 이건 이런 것들이 처음에 쓴 것을 다음의 새것을 바꿀 때 먼저 쓰던 것을 어디다 기부하고 그래요 또 싸게 팔기도 하고 그런 것들을 병원에 있으니까 알아가지고 수술기구 응급실에서 쓰는 것 등 을 여기서 미국병원에서 약간 지나간 것은 쓰던 것이 되지만 북한에 가면 최첨단이 되니까 선배들이 그런 것들을 많이 얻어 가지고 갔어요.

조병선: 제가 북한에 가서 병원을 좀 보고 싶다고 하니까 북한을 너무 모르는 것이 결국은 그것은 특권층을 위한 특수 진료소에서 쓰지 일반 사람들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병원이 되어 그때 그런 일을 추진할 때 저는 참여를 안 했어요. 그런데 결국은 그렇게 되더라구요. 그것은 완전히 특권층을 위한 시설은 해 주는 거예요 북한이 다 그런 식예요 공산주의이면서 귀족이 따로 있는 그런 나라니까...

조병선 씨는 그러나 이번만은 수해를 당한 시골 구석구석 까지 구호품들이 일반 주민 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어 그들의 생활이 조금 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