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문화 기행] 놋그릇-아랫목 이불밑에 살포시 묻어놓은 따뜻한 정

남쪽이나 북쪽이나 놋그릇이 집에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물죠? 일제시대 때는 공출로 무기 만든다고 쓸어가더니 뒤이어 터진 전쟁에 못쓰게 되고.. 전쟁이 끝나고 나니..남쪽에선 가볍고 쓰기편한 스텐레스니 플라스틱에 밀리고.. 북쪽에선 나라에 갖다 바치고 또 팔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놋그릇은 해방부터 지금까지 우리 민족의 역사를 함께해 왔네요.. 남북 문화 기행, 오늘은 이 놋그릇 얘기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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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지난 12월, 개성 통일관. 개성 관광을 떠난 남쪽 관광객들은 점심 시간이 되면 개성 명물이라는 11첩 반상을 받습니다.

아침 나절 내내 보이던 옹색해 보이는 개성을 보고나면 이 북한땅의 사정이라는 게 뻔한 데도, 한상이 넘칠듯이 차려져 나온 밥상을 보곤 코끝이 찡합니다. 관광객들은 대접 받는다는 느낌입니다. 이런 마음은 이 음식들이 아마 모두 놋그릇에 담겨져 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주 잘 차렸네 맛잇게 먹었어"

우리가 그냥 놋그릇이라는 통칭으로 부르는 유기의 종류가 세 가집니다. 모양틀에 놋쇳물을 부어 만드는 주물 유기, 반제품 형태의 주물 유기를 망치로 두드려 만드는 반방짜 , 그리고 달궈진 놋쇠 덩어리를 두드려 만드는 방짜.. 이렇게 나뉩니다.

재료로도 종류가 나뉘는데 구리에 아연을 넣은 주동과 구리와 주석을 넣은 향동이 있습니다. 향동이 더 고급으로 치고 두들겨 만드는 방짜엔 이 향동으로 씁니다.

방짜의 경우 평안북도 정주군 납청을 최고로 쳤고 반방짜는 전라남도 순천 그리고 주물의 경우엔 경기도 안성을 최고로 꼽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안성 맞춤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그릇과 악기는 남쪽이 잘 만들었고 양대나 버치 같은 바닥이 넢고 것은 큰 그릇은 북쪽이 이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유기는 반세기 전만해도 우리 살림 살이에 빠지지 않던 필수품이었습니다. 집엔 이런 놋그릇과 사기 그릇이 함께 사용됐고 부엌 뿐 아니라 세수 대야, 요강, 화로까지 모두 놋쇠로 만들어 썼습니다.

신명나게 두둘기던 징이나 꽹가리도 마찬가지구요. 또 놋그릇은 귀하게 여겨져 제기나 손님 맞이 그릇으로 사용됐습니다. 동네 아낙들이 삼삼 오오 모여, 놋그릇 닦는 것으로 명절이 시작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서울 대방동 사는 올해 83세 황오순 할머니도 기왓장 가루로 놋그릇 닦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기와장을 절구로 곱게 찧어져 그걸로 닦으면 아주 잘 닦여..

또 놋그릇하면 아버지 밥 그릇과 반토막난 수저 얘기를 빼놓 수 없습니다. 겨울이면 어머니는 일 끝나고 늦게 들어오는 아버지를 위해 놋그릇을 하나 가득 밥을 꾹꾹 눌러서 아랫묵 이불 안에 뭍어 놓곤 하셨습니다. 저도 아랫목에서 뒹굴 거리던 겨울날, 발 바닥에 닿던 이 놋그릇 감촉이 기억이 납니다.

할머니 놋수저는 반토막이었습니다. 할아버지 놋수저는 동그란데 할머니 놋수저만 유독 반절이었는데요.. 평생 감자도 까고 음식 간도 보고....이런 저런 부엌일을 도맡았을 할어니의 수저는 할아버지 놋수저보다 더 많이 닳았던 것 같습니다. 평양 출신 김태산 씨의 얘깁니다.

우리집도 반달 같은 녹쇠 숫가락이 하나 있었는데..그걸로 감자도 깍고 또 솥 바닥에 눌러붙은 밥 같은 것 긁어먹고..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요강도 한때 이 놋쇠가 많았습니다. 평양에 살았다가 남쪽에온 김춘애씨도 놋그릇만 보면 매일 밤 요강 닦던 생각이 난다고 하는데요..김춘애씨의 얘깁니다.

이에 아이들이 어리니까 인민 반장 동원 사업이 많찮아요…그래서 문을 밖에서 잠그고 밥 주고 요강 들여 놓고 나가요. 집 옆에 시장이라서 아주 도적이 많아서 집문을 안 잡을 수가 없었어. 그럼 저녁에 들어오면 요강이 아쭈 새까맣게 죽는다구 그럼 그걸 갖다 버리고 닦는데…힘들에 애들한테 괜히 뭐라고 하고 ..(웃음)

또 세수 대야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땅에 굴리면 땡하는 악기 소리나던 놋쇠대야, 황오순 할머니는 지금도 집 창고에 놋대야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본래 살던 경기도 안성에서 서울로 이사올 때 챙겨왔다고 하는데, 이젠 무거워서 혼자 들지도 못하지만 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혼자 일하면서 아이들 키우던 그 시절, 귀한 돈 주고 마련한 것이라 무척 아끼는 물건입니다.

시골에 서울에서 색새가 오면서 놋대야를 해왔는데 그걸 돈이 없다고 내다 판대…그 당시 쌀을 몇말을 줬나.. 비싸게 주고 샀어. 지금 물당구 있는데 있지.

이런 황 할머니가 시집 오던 해는 일본이 한창 전쟁을 하던 때였습니다. 시집 안 간 처녀들을 데러간다는 말에 얼마나 서둘러 혼인을 했는지 당시 흔한 혼수품이었던 놋요강, 놋그릇도 하나 못 해왔습니다.

혼인하고 얼마 안 있어 일본의 공출이 시작됐습니다. 일본은 전쟁 군수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쇠 붙이를 싹 걷어갔는데, 놋그릇은 물론 젖가락까지 내줘야했습니다. 어떤 집은 대대로 내려오던 제기는 눈을 피해 땅에 뭍어 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럽게 숨겨놨던 놋그릇 중 얼마나는 전쟁 통에 깨지거나 잃어버렸습니다. 전쟁 이후엔 플라스틱, 알루미늄, 스테인레스 등 가볍고 사용하기 편한 재질의 그릇이 쏟아져 나오면서 놋그륵 인기가 없어졌고, 또 집집 마다 연탄을 때게 되자 놋그릇을 더 이상 쓸 수 없었습니다. 연탄 가스에 놋그릇이 산화되거나 시뻘겋게 녹이 썰자 뒷전이 됐습니다.

이런 사정은 북쪽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전쟁 폭격에 놋그릇도 많이 깨졌고 전쟁이 이후엔 알루미늄 그릇이 유행했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돈이 되는 놋그릇을 먹을 것과 바꿔먹기도 했고 동 수매를 맞추려고 동생은 뚜껑 형은 사발를 들고 학교에 가면서 집에 있던 놋그릇은 하나둘씩 없어졌습니다.

북쪽의 사정이 좋았던 80년대 중반 .. 이 구리가 좋다는 소문에 한때 놋그릇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죠?

남쪽도 요즘, 같은 이유로 이 놋그릇이 유행입니다. 놋그릇이 식중균에 살균 효과가 있고 농약 등 유해 성분도 검출해 낸다는 검증결과가 방송을 탔는데 그때부턴 큰 인깁니다.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일반 주물 유기보다 구리의 함량이 높은 방짜 유기입니다.

경기도 군포의 한 놋그릇 공방을 찾았습니다. 한적한 국도변 안쪽에 자리잡은 공방에선 들어서자 마자 쇠 두들기는 소리가 쉬지 않고 납니다. 이곳은 평북 정주 납청 방짜를 전수받은 경기도 무형문화재 10호 김문익 선생이 운영하는 곳입니다.

안녕하세요 김 선생님 전화 드렸던 이현줍니다.. 아예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올해로 53년째 놋쇠를 두들겨온 김 선생의 특기는 징이나 꽹가리 같은 악기입니다. 최근에 방짜 유기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그릇도 만드는데, 공방 안 판매장엔 그릇이 나란히 진열돼 있습니다.

요즘은 비싸서 웬만하면 이 그릇 못사지..반상기 전체에 180만원 정도? 원료값도 말도 못하고 오르고 해서 많이 비싸졌지..

김 선생이 처음 방짜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만해도 기술자들이 5일만 일하면 한달을 먹고 살 수 있었지만 시대에 따라 이 방짜 유기장의 굴곡은 심했습니다. 해방 직후 유기장은 그야말로 날렸습니다. 만들기가 무섭게 팔렸지만 이것도 잠시. 전쟁이 났습니다. 전쟁 이후엔 유기의 인기도 사그라 들었고 60-70년대는 유기장의 큰 고객인 무속인의 활동을 제한돼면서 공방은 쉬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괭가리를 많이 팔리건 재밌게도 대학생들의 반대 시위가 많아지면서 부텁니다. 나라 경제 사정이 좀 좋아지면서 전통 공예가 각광을 받고..이젠 자부심을 가지고 유기를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김 선생이 공방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나섰습니다. 여자 치마자락만 봐도 그날은 불을 때지 않았다는 유기장들도 이제 시대에 따라갑니다. 모두 6명이 한조가 되서 3명을 때리고 1명은 불에 굽고 1명은 풍구를 잡았던 때는 가고 이제는 두두리고 깍고 광택을 내는 것은 기계를 사용합니다. 그래도 뇌를 녹이고 담금질 하는 그 뜨거운 불 앞은 사람이 지키고 있습니다.

뭐하시는 거에요? 담금질 하는 겁니다! 불 앞에 계신데요..안 뜨거우세요? 뜨거워요 그래요 어째요..

좌종 소리

이런 방짜 좌종의 맑은 소립니다. 구리와 주석을 녹인 쇳물로 판을 만들고 모양을 잡고.. 여러번의 두들김을 거친 좋은 방짜에서 나는 소린데요..울림이 깊습니다.

떠나는 길에 김 선생에게 그릇 하나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더니 바보 같은 질문에 답은 안 하신다며 돌아섭니다. 몇 번의 두들김으로 한개의 그릇과 한개의 징, 괭가리가 만들어지는 지 헤아릴 수 없듯, 이 놋그릇이 담은 사연과 얘기도 깊고 많습니다.

해방 직후부터 전쟁..또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함께 흘러온 놋그릇이 이제 또 우리 앞에 있습니다.

앞으로 이 놋그릇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우리할 따름이겠지만 해방과 전쟁, 분단, 가난 이런 역사는 놋그릇과 우리가 다시는 겪지 말아야할 과거의 얘기로 끝나야 겠습니다.

남북 문화 기행 놋그릇…이문세의 옛사랑 들으면서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