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남한의 즐거운 ‘김장전투’

이시영-탈북민 xallsl@rfa.org
2024.10.07
[여성시대] 남한의 즐거운 ‘김장전투’ 지난 6월 서울 노원구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 북부봉사관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취약계층에게 전달할 열무김치와 오이소박이를 만들고 있다.
/연합뉴스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이시영입니다. 가을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옵니다. 지금쯤이면 고향에서는 한창 감자전투며 김장전투며 패딩을 입고 화물차 적재함에서 고생할 친구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이곳 대한민국에 정착하는 탈북 여성들은 어디서든 생활력이 강하고 못하는 일이 없는 능력 있는 주부라는 이야기를 듣는답니다.

 

어렵고 힘든 그곳에서 늘자력갱생과 고분투의 혁명정신으로 살아왔으니 이곳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란 동갑내기 친구들보다 가정의 살림살이를 잘하는 예가 있답니다. 물론 모든 것이 기계화되고 완성된 음식, 세탁소가 줄지어서 있는 이곳에서 고추장을 담그거나 집에서 김장을 직접 하는 것이 큰 장점은 아니지만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란 친구들은 탈북 여성들보다 아는 것도 많고 이쁘기도 하고 키도 크고 날씬하고 애교도 많고요. 이야기도 조곤조곤 여성스럽답니다. 하긴 대한민국 서울에 사는 남자들의 목소리도 탈북 여성에겐 귀가 간질거리는 경우가 태반이지요.

 

하지만 모든 일이 장점만 있고 단점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북한에서 태어나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가정을 먹여 살려야 하는 생활고에서 단련된 탈북 여성들의 끈기는 이곳에서도 어렵고 힘든 일을 가리지 않고 먹고 사는 것을 넘어 통장에 차곡차곡 돈이 쌓이는 재미를 더해주는데요.

 

남한 남성이 착한 북한 아내를 만나면 여러가지 장점이 있다고 합니다. 가부장적인 북한 사회에서 남편은 하늘이고 아내는 남편을 늘 존중해야 하고 남자들이 주방에서 일하면 큰일 난 듯이 바라보지만 이곳 대한민국에서는 부부는 인생의 동반자로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서로의 권리를 존중받고 남자도 여자와 같이 살림살이도 하고 육아도 동참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답니다.

 

최근에는 출산의 어려움을 겪는 아내 입장을 느끼기 위해 남편들이 배에 수박이며 물주머니를 차고 다니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답니다. 제 주변에 착하고 이쁜 생활력 강한 북한이 고향인 언니 동생들이 많은데요.

 

며칠 전에는 동생이 남자친구와 함께 사무실에 놀러 왔어요. 키도 훤칠하게 크고 잘생기고 더구나 동생보다 네살이나 어린 남자친구가 동생을 바라보는데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더라고요.

 

신기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물었더니 회사에서 일하면서 처음에는 북한 사투리를 하는 여자가 무섭기도 하고 문화가 서로 다른 측면이 신기하기도 했는데 아무 일이나 가리지 않고 척척 해내는 성실한 모습에 관심이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행복한 속에서 더 행복하고 편리한 속에 더 편리함을 추구하는 여성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지금의 생활에 감사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여자친구가 한없이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남자의 말을 들으니 언니로서 마음이 뿌듯하면서도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이렇게 진솔하게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자유에 감사했습니다.

 

탈북 여성으로 자기 앞가림을 잘하고 사는 동생들을 보면 어딘가 모르게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대견한 것이 저도 이젠 나이가 들었나 봐요. 이곳 대한민국은 정말 발전되고 풍요롭고 문화가 다양하고 착한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지만, 노력하지 않고 남을 배려하지 않으면서 누리려고만 하는 엇갈린 생각을 하면 살아가는 것이 엄청 힘들거든요.

 

인간이 누리는 자유는 본인의 것이지만 그 자유를 온전히 누리는 것에는 개인의 책임 있는 삶의 자세가 받침이 되어야 하니까요. 열심히 일하고 이쁜 사랑을 하는 동생을 보니 북한에서 보낸 나의 20대 시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대학생은 연애하면 안된다고 하여 몰래 숨어서 사랑을 나눴고 신분의 차이로 남녀가 사랑하더라도 아픈 이별을 해야 했고, 각자의 가치관보다 당과 수령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충성심을 부르짖어야 하는 거짓 사랑 맹세를 했던 저의 과거요.

 

저는 과거라고 말하지만, 지금도 그곳에서 표현의 자유가 없이 거짓을 말해야 하고 거짓으로 행동해야 하고 사랑도 계급과 계층을 따지고 먹고 살기 위해 사랑도 팔아야 하는 북한의 청년들에게 한없이 미안하기도 합니다.

 

그날 북한이 고향인 여자친구를 소개할 때 부모님이 조금 당황 하시지 않았는가 하고 물었더니 부모님이 저보다 여자친구를 더 좋아하신다고 자랑했답니다. 작년에 소개하고 가을에 김장하는 날 여자친구가 얼마나 성실하게 부모님을 도와드렸는지 가족들 사이에서 인기스타라고 했답니다.

 

사실 북한에서 김장전투를 한번이라도 경험한 여자라면 이곳에서 김장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쉽거든요. 시장에 나가면 싱싱한 해산물이 바다를 이루죠. 김장배추는 절임에 알뜰하게 씻어 상자에 10포기씩 넣어 문앞에 배달되죠. 마늘과 생강도 믹서기에 확 돌리면 되고요. 김치를 담가 김칫독에 넣는 게 아니라 5킬로씩 들어가는 플라스틱 김치통에 담아 주방에 있는 김치냉장고에 넣으면 끝이니까요.

 

북한에서는 김치가 한해 농사에 가깝게 중요하지만 이곳에서 김장은 가족이 모여 돼지고기를 삶고 굴을 무치고 햇김치에 쌈을 싸먹기 위한 가족모임의 일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랍니다. 이런 곳에서 김장한다면 매일 해도 북한이 고향인 여성들은 자신 있을 것 같아요.

 

물론 10년이 지난 지금 해마다 담그던 김장을 이번 해에는 피하고 싶지만 또 김장철이 오면 고향 언니들 동생들이랑 한끼 모여 맛있게 먹고 혼자 사는 동생들에게 김치도 나눠주기 위해 150포기 정도 김치를 담그지만요.

 

남한이 고향인 여성들은 150포기 김장을 한다고 하면 큰일 난듯이 그 어려운 걸 굳이 하느냐고 겨울에도 김치를 판매하는 업체가 엄청 많다고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골병든다고 걱정하지만 북한에서 김장전투를 할 때를 생각하면 콧노래를 부르면서 김치를 담근답니다.

 

해마다 이 좋은 세상에서 어려움을 피하고 힘듦을 피하고 즐거움에 편리함만 찾지만 늘 고향에서 고생하시는 북한주민들을 생각하면서 서로의 나눔과 봉사도 기쁨으로 생각하고 참여하는 탈북민들이랍니다.

 

이곳은 지구온난화로 아직은 늦여름 날씨라 가벼운 니트 하나 걸치고 치마를 입고 다니지만 우리 고향 양강도에는 새벽이면 서리가 내리겠죠. 마당에 고인 물에도 살얼음이 낄텐데 올해 겨울에 우리 친구들에게 어려움보다는 따뜻함이, 배고픔보다는 조금 더 풍요로움이 찾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행복한 친구는 오늘도 미안한 마음으로 고향을 떠올립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시영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진서, 웹편집 한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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