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가을 단상

김태희-탈북자
2022.08.30
[여성시대] 가을 단상 강원 평창군 진부면 월정사 입구의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다.
/연합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김태희입니다.

가을을 알리는 처서가 지나가면 본격적인 가을을 알리는 백로가 다가옵니다. 백로는 흰 이슬이라는 뜻인데요. 기온이 떨어져서 아침에 일어나면 풀잎에 이슬이 맺힌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하네요. 이때가 되면 농촌에서는 겨울에 먹을 김장배추를 심느라 분주하죠. 한국에서도 예외 없이 지금부터는 배추를 심어서 모종을 만들어 심고, 무를 심는 등 겨울 준비를 하느라고 바쁘답니다.

 

오늘은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떠오르는 생각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기와지붕에는 빨간 고추가 한가득 널리고 집집마다 무우며 호박을 얇게 저며서 오가리를 만들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지붕에 널어놓으면 간밤 다 잊어버릴까봐 그때의 그 풍요롭던 풍경을 볼 수가 없겠구나 생각하니 서글퍼집니다. 가을에 배추를 손질하고 떡잎을 한겨울에 죽을 써먹자고 기와지붕에 얹었는데 한밤중에 도둑이 와서 다 걷어갔지요. 그러면서부터 북한에서는 지붕에 널어놓는 풍경이 사라지고 아무리 어렵더라도 모두 집안으로 들여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은 북한처럼 고추며 호박을 썰어서 오가리를 만드는 일은 별로 없지만 탈북민 우리들에게는 아직도 북한에서 살던 생활 풍습을 잊지 못해 가끔씩 만들어가는 습관이 남아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탈북민들이 올리는 다양한 글들을 읽어보면 재미있고, 슬픈 일 그리고 공감이 가는 일상들도 많은데 그 중에 제 눈에 뛴 글은 가지를 농사지어서 이 많은 가지를 말리면 겨울에 맛있을까요? 라고 올린 질문이었습니다.

 

여러 탈북민들은 그럼요, 겨울에 볶아먹으면 당연히 맛이 있죠. 하는 답과는 달리 저는 가지들을 말려서 겨울에 먹어질까 하는 걱정이 들었답니다. 그건 저도 지난해 고추를 말려놓고 일년이 지나도록 먹지 않아서 냉장고에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풋고추를 썰어 말릴 때까지만 해도 반 건조한 명태 코다리를 잘라서 맛있게 볶아 먹어야지 라고 작정하면서 말렸는데 정작 겨울이어도 상점들이며 시장에 나오는 싱싱한 야채들을 보면서 말려놓은 야채를 꺼내서 음식을 해먹게 되지는 않았지요.

 

그래서 냉장고를 지키게 되다 보니 제 생각이 나서 가지를 말리려는 친구에게 아서라, 왜 싱싱한 야채를 먹지 고생스레 말리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가지가 너무 많아서 썩어서 버릴까봐 말린다고 하네요. 어쩌면 한국에서는 야채들이 썩어서 버리는 것은 늘 있는 일이지만 탈북민 우리들은 야채들이 썩어서 나가면 고향생각부터 먼저 하게 되는 가봅니다.

 

불현듯, 그곳에서는 쉽게 먹을 수 없었던 가지며 오이, 토마토와 고추 심지어 보지도 못했던 수박들마저도 한국에서는 올해 유난히 심했던 장마 비에 맛이 다 가고 버릴 수밖에 없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아까운 것들을 고향에 가져가면 얼마나 좋아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고향에 가져간다고 하면 가장 좋은 걸로 아끼던 것들까지도 다 꺼내서 들고 갈 우리들이지만 정작 이렇게 버려지는 생필품들과 식품들을 볼 때마다 고향생각을 안 할 수가 없네요.

 

어느 탈북민이 올린 글을 보니 북한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배낭을 메고 한 밤중에 주변 토마토 밭에 가서 토마토를 따왔는데 배고파서 먹으려고 보니 어두운 데서 따온 토마토가 모두 파란 것만 따서 왔다네요. 그래도 배가 고파서 먹었는데 빈속에 익지 않은 토마토를 먹고 속이 쓰리고 속탈이 나던 이야기를 해서 왜 하필이면 파란 토마토만 땄냐고 놀렸지만 지금은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그땐 얼마나 서글펐을까 하는 생각도 함께 해봅니다. 그게 지나간 우리 삶이었고, 지금도 살아가는 북한주민들의 삶이니깐요.

 

제가 북한에서 갓 중국의 시골로 갔을 때 생각도 납니다. 가난한 중국의 시골생활에 고추를 커다란 마대로 세 마대나 사서 말리려 했는데 늘 이맘때면 들이닥치는 태풍에 밖에 내다 널 수가 없어서 집안에 한벌 널었는데 축축하게 비에 젖은 고추가 뜨거운 방바닥 열에 떠서 밑은 시커멓고 안에 곰팡이가 껴서 철없던 새댁시절, 고추가 떠가는 매캐한 냄새와 함께 그 많은 빨간 고추를 말리지 못해서 안절부절 못하던 때가 떠오릅니다.

 

지금은 상점이나 온라인에서조차 건조기에 말린 것, 자연적으로 태양에 말렸다고 해서 태양초라고 부르는 것 등을 골라가면서 구매할 수도 있습니다. 또 말려서 가루 낸 것으로 구매할 수도 있고 김장할 때 필요한 마늘도 까서 파는 것도 있고, 껍질도 있고 대까지 다 붙어 있는 통마늘로도 구매가 가능하지요. 그리고 말린 나물도 가지며, 오이, 호박 그리고 고구마줄기까지 포장해서 판매하는 것도 있습니다

 

가을이 오는 지금 우리는 겨울에 먹을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북한에 있는 내 가족은 겨울을 날 준비를 할까? 아니면 지금 당장 이 순간 먹고 살 것을 위해 뛰어다닐까 생각을 해보니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북한주민들도 우리처럼 오늘이 아니라 내일과 겨울, 그리고 먼 훗날까지도 만들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진행 김태희, 에디터 이진서, 웹팀 이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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