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차 한잔의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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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김태희입니다. 시월의 차가운 바람이 불어서 이제는 논밭의 벼이삭도 황금색을 띠고 과수원의 주렁주렁 열린 과일나무를 바라보면서 내 고향 들녘은 이제 벼 가을을 끝내고 단을 쌓아서 가을 바람에 알알이 영군 낱알을 말리기에 바꾸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살던 곳은 벼가을을 마치고 서리가 내리면 강냉이 가을을 하는데 서리를 맞아 고개를 푹숙인 강냉이 이삭을 따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죠. 그런 가을 들녘을 생각하면서 차 한잔을 마실 시간을 가져봤습니다.

한국에서는 사람을 만나면 의례적으로 하는 인사말이 있습니다. “밥이나 한끼 먹자”고요.

처음 한국에 와서는 밥 한끼 먹자고 하면 언제 밥을 먹자는 전화를 줄지 많이 기다렸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헤어지면서 밥을 먹자는 인사말에 대한 오해로 인해 지금도 최대한 밥을 먹자는 말을 꼭 식사를 해야만 할 사람에게 하는 인사로 건네고 그런 말을 했으면 밥을 먹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한국에서는 헤어질 때 다시 보자는 가벼운 인사말로 밥을 먹자는 말도 있지만 차 한잔 마시자는 말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너하고 밥 먹은지도 오래되지만 시간이 안되니 차라도 한잔 하자”

밥보다 가벼운 차를 마시자는 말도 있는데 북한에서 갓 왔을 경우는 차를 마시자고 하면 그뜻을 이해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차를 마시자고 하면 “나 기왕이면 좋은 차로 사줘” 하고 우스개로 넘기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말을 또 나이 든 사람만이 하는 장난이라는 뜻에서 “아재개그”라고도 말합니다. 아재라는 말은 나이가 있는 중장년에 속하는 연령대를 말합니다. 밥 먹을 시간이 안되는 경우는 가까운 찻집에 가서 가볍게 얘기를 나누자는 말인데 한국은 음료수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가게가 수없이 많습니다.

북한에서 어렸을 때 봤던 영화 중에 “이름없는 영웅들”이라는 영화가 생각이 납니다. 한국전쟁을 다뤘던 영화인데 다방 마담이었던 숙영이가 미군을 상대로 차를 팔고 정보를 빼내오던 그런 영화였는데 고위급 장성들도 찻집에 와서 차 한잔이나 위스키를 마시면서 중요한 이야기들을 하다보니 그런 정보를 얻어낼 수가 있었죠.

하지만 지금 한국문화의 찻집은 그런 개념이 아닌 편하고 어쩌면 수다를 떨기에도 딱 좋은 그런 공간이 된 듯 합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중요한 이야기를 고급식당이나 찻집에서 나누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사람이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장소 그리고 길을 가다가 문뜩 앉고 싶은 장소가 찻집입니다.

집에서 가사일만 하는 여인도 바쁜 아침 시간에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바로 찾아가는 곳이 찻집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런 곳에서 같은 또래의 여성들이 앉아서 수다삼매경을 떨다가 한 사람이 “어머, 시간이 이리 되었네, 나 가봐야 돼 나중에 전화할게,” 하고 일어나면 “나도 가야 돼” 하면서 우르르 일어나는 경우가 많지요. 이런 건 한국에서 살아가는 보통 아줌마들의 일상인 듯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려고 남녀가 만나야 할 때에도 편한 곳이 찻집이고 연인끼리 만나기 좋은 곳도 찻집입니다. 다니는 교회에 함께 예배를 드리려고 찾아오는 한 탈북민 남성이 있습니다. 늘 예배를 드리고 밥 한끼를 먹자고 하지만 남녀사이에 밥을 먹기에는 세간의 이목이 신경 쓰이고, 얼핏 부부로 보이기 쉬울 것 같아서 선택한 곳이 찻집에서 차를 한 두번 마시는 것입니다.

언니들은 늘 인터넷에 어느 까페가 이쁜지 그리고 주변환경이 잘 되어 있는지를 찾아봅니다. 그리고는 한시간도 넘는 길을 차를 타고 가서 그곳에서 안부를 묻고 수다를 떨고 사진도 남기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날려보냅니다. 그래서 한국의 찻집인 까페들은 최대한 이쁘게 그리고 아기자기하고 예쁜 소품들로 실내장식을 하지요.

그리고 요즘은 빈티지라는 말도 자주 쓰는데 빈티지는 옛날 아무것도 없이 투박하게 막 꾸몄던 것의 표현인데 그런식으로 천장에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고 전등만 달아도 그런대로 멋있게 보이는 경우가 있어서 찾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찻집에서는 예전에는 대추차며 십전대보탕 같은 것들을 팔았다면 지금은 커피를 제일 많이 파는 것 같네요. 저 역시도 집에서도 커피 두잔은 먹어야 할 정도이니 여기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겠죠. 아침에 일어나서 빈속에 커피를 마시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은 그것이 건강에는 안 좋은 것이라고 하지만 카페인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밥보다는 커피를 찾게 됩니다.

커피와 함께 각종 과일과 함께 얼음을 갈아서 만든 과일 스무디는 더운 여름날에는 깊은 곳까지 시원하게 해줍니다. 더우면 시원한 얼음을 띄워서 마시고, 추운 계절에는 따뜻하게 먹을 수 있는 여러가지 차를 마시는 생활이 지금 빈손으로 찾아온 우리도 누릴 수 있는 권한이고 호사이네요. 그러고보니 찻집 즉 까페는 가끔 기분에 따라 어떤 환경에서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찾아가는 곳인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도 찻집 문화에 적응이 안된 저는 다른 사람이 찾아서 이끄는대로 가거나 일 때문에 가서 차 한잔을 마시지만 이제는 분위기 좋은 곳에서 골치아픈 생각을 떨치고 기분전환을 하는 내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에디터 이진서,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