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육보다 가까운 친구

김태희-탈북자 xallsl@rfa.org
2021.11.23
혈육보다 가까운 친구 탈북자들이 태국의 한 경찰서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REUTERS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김태희입니다.

날씨가 추워지니 우리 고향 분들은 지금쯤 무엇을 할까? 이번 겨울을 또 어떻게 날까? 걱정을 하게 됩니다. 지난주 토요일 저는 오래간만에 친자매 같이 지내는 언니에게 전화가 와서 양산에 사는 아는 동생이랑 세 명이 만나서 수다도 떨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왔습니다.

한국에 오기 위해 거쳤던 태국 이민국 수용소에서 만났던 언니인데 고향이 저와 같은 회령 사람입니다. 그 언니는 중국에서 만난 남자가 같은 탈북자인줄도 모르고 2년간을 함께 살다가 한국 행을 결심하고 떠나려 하는데 같이 가자고 하더라는 군요. 그래서 “당신은 못 가, 이 길은 탈북자들이 목숨 걸고 가는 길이야” 하니 자신도 탈북자라고 그때에야 이실직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태국 이민국 수용소에 있을 때 늘 우리에게 놀림을 받던, 이쁘기도 하지만 성격도 좋고 똑똑하기도 하던 언니가 이제는 한국사회에 정착을 하자 우리들의 맏언니가 되어서 동생들을 일일이 챙겨준답니다.

녹취: 아니, 그냥 저기 시간되면 아라랑 같이 밥 먹을까? 너, 아라 본지 오래 되냐?

5살밖에 안된 얼굴도 못 본 탈북자 자녀를 중국의 비좁은 기차 안에서 안고 오고 라오스와 태국의 밀림을 업어서 함께 온 언니이기에 우리들의 맏언니 역할을 잘 할 수가 있겠죠. 태국 이민국 수용소의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언니는 비좁은 자리에서 그 아이를 안고 3개월을 버텨내고 아이를 한국으로 데려와서 자기 엄마의 품에 안겨주었답니다. 그런 언니가 남한사회 적응 교육 시설인 하나원을 졸업하자마자 북한에서의 학력과 전공을 인정받아 취직을 해서 좋은 직장을 다닐 수 있었는데도 마다하고 자신만의 꿈을 찾아서 회사를 꾸리고 지금은 어엿한 사장이 되었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탈북민들 중에 제가 사랑하는 언니가 있음에 참으로 감사한 일이죠. 전 세계가 코로나로 인하여 경제불황을 겪고 있는 이 때 언니는 사업을 확장해서 제가 사는 가까운 곳으로 이전하여 공장도 세우고 일꾼들도 추가하여 중국에 제품 생산과 무역을 함께 하는 일을 하는데 공장 앞마당에 즐비하게 늘어서서 수출을 기다리는 컨테이너들을 바라보니 새삼 언니가 자랑스러웠습니다.

지금은 고향에서 아들도 데려와서 그 아들이 대학 4학년인데 내년에는 정식 교사가 돼서 학교로 발령이 난다고 하네요. 혹시 섬마을로 발령 나면 어떻게 하냐면서 언니 아들은 한국 노래에서도 유명한 “섬마을 선생님”이 되겠네? 가슴이 아파서 어떻게 섬마을로 보낼 거야? 했더니 “북한에 비하면 너무나도 행복한 거 아니야? 그 정도 힘들다고 징징거리면 북에서는 어떻게 살아왔는데” 하고 이야기하는 언니의 단호한 모습에 어쩌면 강인한 엄마 밑에서 잘 자라난 우리 아이들의 밝은 미래가 보였답니다.

언니랑 저는 자주 만나기에 지방에 내려온 김에 친한 동생을 함께 부르기로 했는데요. 몇 년 전 탈북민들로 구성된 기자단에서 세 명 모두 함께 활동한 적이 있는지라 온순하고 조용하던 그녀가 걸걸하게 남자들처럼 변한 모습에 웃고 떠드느라 아줌마들의 수다는 온 하루 시간이 모자라는 듯 하였습니다.

남편 이야기부터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다가 또다시 태국과 국정원, 하나원을 거쳐 우리가 태어나고 살아온 고향, 북한에 대한 옛추억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양산에서 사는 동생은 지금도 탈북자 이야기를 전하는 기자로 활약을 하고 또 개인적으로는 미용실도 내서 자영업도 함께 합니다. 신기한 것은 얼마 전까지 집에 좋은 차를 세워놓고도 운전을 못하던 동생이 이번에 작은 소형차를 직접 운전해 와서 놀랐답니다.

한국에서는 운전 면허증을 따고 운전을 안 하면 장롱면허라고 놀리는데 이 친구가 십 여 년이 넘게 장롱면허였거든요. 그리고는 늘 오토바이만 타고 다녔지요. 집에는 고급 봉고차(카니발리무진)를 세워두고 늘 오토바이나 택시를 타고 다니는 모습에 차를 몰고 다니라고 핀잔을 줬는데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드니 여자들은 남자들처럼 성격이 바뀐다는 말이 맞나 봅니다. 아직은 큰 차를 운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작은 차라도 직접 운전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또 기특하기도 하네요.

한국은 보통 가정마다 자가용 한 대 정도는 거의가 있는 편이고 보통 성인이 되면 제일 먼저 장만하는 것이 자가용 이랍니다. 그래야만 일하러 갈 때도, 볼 일 보러 나갈 때도 편리하거든요. 힘들게 큰 보따리나 배낭을 낑낑거리고 이고 지고 들고 다니던 북한과는 달리 한국은 상점을 가더라도 자기 차를 가지고 가서 카트라고 부르는 매장 내에서만 사용하는 밀차 같은 것을 이용하여 물건을 담고 또 차에 옮겨 싣는 답니다. 그렇게 하면 여성들도 엔간한 많은 짐들도 쉽게 구매하여 가져올 수가 있지요.

한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리면 북한에서 한국이 바라보이는 최전방에서 야간보초를 서던 신병군인이 도로를 쌩쌩 달리는 한국의 자동차 불빛을 보고 분대장에게 물었다는 군요. “분대장동지, 남조선에는 무슨 자동차가 저리도 많습니까?” 그러자 분대장이 신병군인의 뒤통수를 툭 치면서 “야, 남조선 놈들이 우리 공화국이 보라고 매일 전국의 자동차를 다 긁어 모아놓고 온 밤 저렇게 왔다 갔다 한단 말이야”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신병군인은 제대될 때까지도 남조선에서는 전방지대에 자동차를 줄을 세워서 온밤 다니게 하는 줄로 알았다고 탈북하여 고백을 했답니다. 그런데 실제 한국에 와서 보니 서울이며 지방까지도 차가 너무 많아서 그때 본 차 수량은 많은 차도 아니었다고 했죠.

실제로 서울, 부산을 비롯한 한국의 출, 퇴근길은 차가 너무 많아서 가다 서다 반복하고 특히나 민족대이동이 있는 설이나 추석은 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길도 열 시간씩 걸리는 일이 해마다 일어나지요.

어쨌던 몇 년 사이에 동생의 변한 모습에 우리의 모습도 돌아봤답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에는 촌때를 벗지 못해 피부도 까맣고 한국말도 잘 알아듣기 힘들던 우리가 이제는 한국생활 10년에 회사 사장도 되고, 신문사 기자가 되어있는 모습을 보면서 여자는 집에서 살림하고 애 키우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이 옛날 얘기처럼 느껴집니다.

진행 김태희, 에디터 이진서,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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