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필리핀의 양다리 외교

김태우- 동국대 석좌교수
2020-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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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미국과 필리핀 간의 관계가 불편해진 것 같습니다. 필리핀에서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2월 11일, 1999년에 미국과 맺은 방문군협정(VFA)을 폐기한다고 선언한 이후에는 양국 간 긴장이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이 선언이 나온 것은 두테르테 대통령의 측근으로서 마약범 소탕을 주도했던 전 경찰청장이자 현 상원의원인 로널드 로사에게 미국이 비자 발급을 거부한 직후에 발생했는데, 그래서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감정싸움에서 빚어진 해프닝으로 보기도 합니다.

필리핀은 미국의 오랜 동맹국입니다. 필리핀은 16세기 중엽부터 스페인의 식민지였으나,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2차대전 중 3년 간 일본군의 지배를 받았으나 미군이 다시 일본군을 물리침에 따라 1946년 7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정체성으로 하는 서방국가의 일원으로 독립국이 되었습니다. 1951년에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으며, 이후 미국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는 전형적인 친미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86년 민주혁명으로 21년간 철권통치를 해오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부가 축출되면서 반미정서가 확산되었습니다. 1987년 필리핀이 자국내 미군기지 폐쇄를 명령하는 신헌법을 채택하고 1991년 필리핀 의회가 미군 주둔 연장안을 부결시킴에 따라 1992년 미군은 필리핀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상황은 전혀 녹록치 않았습니다. 중국이 군사 강국으로 부상하고 남중국해의 대부분을 자신들의 영해라고 주장하는 남중국해 내해화(內海化)를 시도하면서 필리핀을 포함한 연안국들은 완력을 앞세우는 중국의 팽창주의 파고에 크게 시달려야 했습니다. 미군이 떠난 후 중국은 필리핀령 섬들을 무력 점령하여 군사시설을 건설했고, 필리핀 어선들을 압류하고 군함을 보내 무력시위를 벌렸으며, 필리핀 앞바다에 있는 섬들에 대해서도 영유권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필리핀은 1999년 미국과 방문군협정을 체결하여 미군이 재주둔할 길을 열었으며, 중국 팽창주의의 파고가 높아지는 것에 비례하여 미-필리핀 관계는 급속히 복원되었습니다. 미국의 필리핀 반군소탕 지원, 미-필리핀군의 연합훈련, 군수지원협정 등이 이어졌습니다. 2014년에는 방위협력확대협정(EDCA)를 통해 미군이 장기간 체류할 수 있는 길을 열리고 2016년 3월에는 향후 10년간 미군이 필리핀내 공군기지 네곳과 해군기지 한 곳을 사용하는데 합의함으로써 미군이 다시 필리핀에 주둔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2016년 두테르테가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재반전이 시작됩니다. 그는 취임과 동시에 중국을 향해 미소를 보냈고 국내적으로는 사법절차를 생략한 채 마약범을 사살하는, 화끈한 마약소탕으로 인권문제를 야기했습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인권 문제를 제기하자 “나는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다”라고 외쳤고, 그 때문에 2016년에 예정되었던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취소되는 사태가 발생하지만,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서는 미국을 “중요한 동맹”이라고 치켜세웠습니다. 그래놓고 2018년 시진핑 주석을 만나서는 중국은 필리핀에 가장 중요한 나라로 선언했고, 중국해군과 연합훈련을 실시하고 해양협력에도 합의했습니다. 2018년 중국이 필리핀이 자국령이라고 주장하는 도서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여 국내여론이 악화되었을 때에는 “중국 미사일은 필리핀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주기 위한 것”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지금 필리핀의 두테르테 정부는 최대 교역상대국이자 경제파트너인 중국과 군사적 동맹국인 미국 사이에서 전형적인 ‘양다리 외교’를 벌이고 있습니다.

필리핀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일부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필리핀의 핀란드화(Finlandization)를 우려합니다. 1930년대 동안 핀란드는 유럽의 군사강국으로 부상한 히틀러의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를 펼치지만, 1939년 11월 소련군이 쳐들어오자 4개월을 버티다가 항복하고 영토의 10%를 할양해 주어야 했습니다. 국제정치 학자들은 이를 핀란드화라고 부릅니다. 즉, 약소국이 서로 경쟁 중인 양 강대국 사이를 오가는 등거리 외교를 지속하다가 양쪽 모두의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어 위기시 어느쪽으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는 현상을 말하며, 많은 전문가들은 핀란드화를 국제정치의 진리 중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미국-필리핀 간의 방문군협정은 어느 일방의 폐기 선언 이후 180일 이후 효력을 상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180일의 유예기간 동안 조정이 이루어져서 양국관계가 제 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대합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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