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아] 북한의 궁중 언어 ‘선물’
2023.11.20
11월 16일은 북한에서 ‘어머니 날’이었습니다. 북한 지도부는 이날을 맞으며 어머니를 존경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각종 기념행사를 조직했습니다. 특히 청년동맹에서는 동맹원들에게 1주일간 기한까지 정하고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라는 특별 지시를 하달했습니다. 그를 위해 이날에 어머니와 함께 거리에 나가 즐기면서 외식도 하도 축하장도 보내고 선물도 드리라고 구체적인 방도까지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 드리는 선물을 선물이라고 하지 말고 기념품이라고 해야 한다고 특별히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선물은 오직 김정은과 연관 지을 수 있는 상징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선물을 선물이라 하지 못하고 기념품이라고 불러야 한다니? 북한에서 단어 ‘선물’의 수난은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74년 김정일은 후계자로 등장하면서 1인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원칙”을 제정했습니다. 10대원칙에서는 김정일의 지위를 위협하게 될 2인자의 등장을 막기 위해 6조와 9조에 전당의 강철같은 통일단결, 유일적 영도를 보장하기 위한 각종 원칙을 설정했습니다. 그 중에는 “개별적 간부들에 대하여 환상을 가지거나, 아부 아첨하며 개별적 간부들을 우상화하거나 무원칙하게 내세우는 현상을 철저히 반대하여야 하며 간부들이 선물을 주고받는 현상을 없애야 한다”고 한 6조 4항도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가 많지 않았지만, 이때부터 간부들이 아랫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것은 물론 사람들 간에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선물은 오직 지도자만이 줄 수 있는 것으로 된 것입니다.
2013년 김정은이 등장하면서 10대원칙이 수정되었습니다. 수정된 10대원칙에는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를 금하라는 조항이 삭제되었습니다. 그러나 간부들은 10대원칙의 문항에서는 사라졌어도 실질적으로 그 원칙이 없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노동신문에도 어머니께 드리는 선물을 ‘기념품’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시당위원회에서는 어머니에게 선물을 드린다는 말은 남한 괴뢰들이 쓰는 말로 자본주의 온상이라고 지적했다고 합니다. ‘어머니 날 기념품’이라는 표준 문화어가 얼마나 좋은가, 우리의 고유한 문화어를 존중하고 표준 문화어를 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강조까지 했다고 합니다. 남한에서는 어버이날, 어머니 생신 등을 맞으며 자식들이 부모에게 선물을 드리는 문화가 일반화돼 있습니다. 이러한 기념일이 되면 부모들이 제일 좋아하는 선물은 무엇인가 설문조사까지 하고 순위를 발표하기도 합니다. 올해 조사에서는 받고 싶은 선물 1위로 현금, 2위는 효도관광 또는 홍삼 등 건강식품, 3위 가전제품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이렇게 선물은 남한에 일반화된 문화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남한에서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한반도에서 ‘선물을 드리다’라는 문구는 18세기 문헌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션믈’이라고 하다가 ‘션’이 ‘선’으로 바뀌고 ‘ㅡ’가 ‘ㅜ’로 원순 모음화 됨에 따라 현재의 선물로 정착되었습니다.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괴뢰문화로, 나쁘기만 하다면 북한의 지도자는 왜 주민들에게 선물을 주는 권한을 독점하려고 하겠습니까?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은 남북에 거쳐 널리 통용되던 것인데 간부들이 선물을 주고받는 과정에 지도자를 반대하는 그룹이 형성되는 것이 두려워 지도자만 독점하는 정치문화로 변경시키다 보니 억지로 된 설명을 늘어놓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한반도에서도 왕이 존재하던 시기에는 왕만 쓸 수 있는 궁중 언어가 별도로 존재했습니다. 왕의 밥상을 수라상, 왕의 얼굴은 용안, 왕의 옷은 곤룡포 등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21세기 사회주의국가를 자처하는 북한에서 지도자만이 독점할 수 있는 궁중 언어가 새로 생겨나고 있으니 북한체제가 왕정국가라는 평가가 틀리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