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수필] 루마니아식 주체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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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동율럽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기 전 북한과 가장 비슷하던 동유럽 나라는 북한에서 "로므니아"라 불리는 루마니아였습니다. 2차대전 직후 루마니아는 소련의 군화발에 짓밟혀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1965년 소련의 지지를 등에 엎고 니콜라에 차우체스쿠가 루마니아 공산당 사무총장이 되었고, 2년 뒤 대통령이란 직책을 만들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1971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차우체스쿠는 주체 사상과 개인 숭배, 그리고 평양의 웅장한 도로를 접한 뒤 크게 감탄한 나머지 귀국 후 수도인 부카레스트를 평양처럼 대중들이 모여 지도자를 숭배할 수 있는 도시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루마니아식 "주체"를 건설하기 위해 연필에서 자동차와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외국의 협조없이 자체적으로 생산하려 했습니다.

그러다가 70년대 초반에 차우체스쿠는 어느 정도 소련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로 서방세계로부터 지지를 얻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미국과 서유럽간의 경제협력이 이뤄지기 시작했으며 이를 통해 루마니아의 자동차 산업과 화학 산업은 물론 항공 산업까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70 년대 중반까지 이같은 국제 경제 협력과 루마니아인들의 노력을 통해 루마니아의 경제는 많이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루마니아 경제가 성장하고 국제 교류가 늘어나면서 차우체스쿠의 공산 독재 체제, 개인 숭배와 인권 위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국제사회에서 종전보다 더 크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차우체스쿠는 한편으로 경제성장을 만끽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정치, 사회, 경제분야의 개혁을 원치 않았습니다. 북한 방문을 통해 반드시 루마니아식 "주체"를 이룩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개인 숭배와 독재 체제에 대한 비판을 막기 위해 루마니아 사람들이 외국인들을 만나 토론할 기회를 더 이상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루마니아 학자들은 국제 회의에 참여할 기회가 점점 줄어들었고, 루마니아의 과학기술 발전도 거의 멈추고 말았습니다. 한 예로 당시 언어학자였던 저의 어머니는 프랑스 수도인 파리에서 열리는 국제 언어학 회의에 참석해달라는 초대를 받았지만, 여권이 발급되지 않았습니다. 80 년대 중반에도 어머니는 불가리아에서 열리는 국제 학술회의에 참석하고자 했지만, 불가리아는 루마니아의 이웃나라이고 같은 공산주의 국가였음에도 당국의 출국허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자원이 부족한 루마니아에서 그나마 화학 산업과 석유 공장 등 중공업을 발전시키려면 외국자본의 투자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80년대 차우체스쿠의 고립 정책 탓에 루마니아의 산업은 형편없었습니다. 이를테면 부카레스트에 커다란 건물을 짓는 데 시일이 많이 걸리고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외자가 필요했습니다. 외채를 갚기 위해 루마니아는 농산물과 식료품을 해외에 수출해야 했고 수입을 줄이기 위해 산업 생산에 필요한 기계와 부품은 물론 소비제의 수입은 전면 중단시켰습니다. 정부가 또 전기를 절약한다는 명분아래 정전을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식량 부족과 전력난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던 루마니아 국민들은 소련이 와해될 조짐을 보이던 1989년말 마침내 반독제,공산주의 유혈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독제자 차우체스쿠와 남편 위세를 등에 엎고 활개를 치던 부인 엘레나도 군사 재판을 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지 20년후 루마니아는 폴란드, 헝가리나 체코, 다른 동유럽나라들처럼 개혁과 개방의 길을 선택해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시장경제가 되며 유럽연합과 미국이 주도하는 민주주의 국가들의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했습니다.

루마니아식 "주체"의 실패는 오늘날처럼 국가간에 상호 의존이 갈수록 심해지는 지구촌 시대에 북한처럼 대외적인 고립과 독제체제에 안주하면 결국 생존할 수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북한이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개방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북한이 개방하면 할수록 김정일 독제체제의 생존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