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코프] 북한 합영법의 추억

란코프 ∙ 국민대 교수
2024.09.05
[란코프] 북한 합영법의 추억 북한 무역성 산하 조선대외경제투자협력위원회와 중국의 GBD공공외교문화교류센터가 지난 2012년 개최한 황금평ㆍ위화도, 나진 경제특구 투자설명회.
/연합뉴스

란코프 교수
란코프 교수
40년 전인 1984년 9월 8일,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합영법을 채택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저는 당시에 평양에서 유학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분위기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은 북한도 중국을 본받을 줄 알았습니다. 즉, 북한이 중국 최고지도자 등소평이 시작한 개혁개방 정책을 따라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1980년대 초, 주민들이 매우 어렵게 살아왔던 중국은 빠른 속도로 성장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웃 나라들도 중국을 모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중국의 경제성장, 생활수준 향상을 가져온 것은 외국 회사들의 투자, 특히 합영회사의 활동이었습니다. 북한도 합영법을 채택했으니, 아마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자들은 정말 중국에서 배울 생각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북한 지도자들의 희망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중국이 1970년대 말 합영회사를 허용하자, 몇 년 이내에 수천 개의 외국 회사들이 중국 시장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반면 북한에서 합영법을 이용한 회사는 수십 개도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들 중 다수는 재일교포 자본가들이 경영하는 회사 즉 조총련계 회사들뿐이었습니다.

 

북한에서 합영법이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몇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요. 하나는 북한 경제규모가 중국에 비하면 너무 작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국 자본가들은 북한에 대한 관심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1970년대 말, 북한이 해외에서 빌린 차관을 갚지 않겠다고 선언한 일 때문입니다. 자신의 약속을 휴지 조각처럼 파기한 북한 정권을 보고 많은 나라의 회사들은 북한을 믿기 어려운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유들 외에 합영법이 실패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북한이 유연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경우, 합영회사를 만든 외국회사들은 자신의 대표자들을 중국으로 많이 보냈고, 그들은 중국 측 간부들과 같이 시골 공장에서 함께 지내면서 회사를 경영했습니다. 그러나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북한에서는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북한은 외국 경영자들을 전혀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북한 지도자들은 말로는 “외국에서 매우 위험한 사상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만 진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가난한 나라인 북한 주민들이 이웃 나라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 알지 못하도록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북한과의 협력에 대해 관심이 있는 외국 사업가들은 북한에서 합영회사를 만들 경우에도 자신이 직접 공장으로 가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고용할 수도 없고 해고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일을 잘하는 노동자들에게 보상을 많이 줄 수 없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이러한 조건을 알게 된 외국 회사들은 북한에 투자할 의지가 별로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아무 때나, 조건이 훨씬 더 좋은 중국이나 베트남(윁남)으로 가서 합영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북한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결국 1984년의 기대와 달리, 합영법은 북한 경제가 중국 경제나 베트남 경제처럼 빠르게 성장하도록 만들지 못했습니다. 당시 북한엔 합영회사가 많이 생기지 않았고, 생긴 회사들도 대부분은 1980년대 말 들어 몇 년 이내에 문을 닫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합영법을 경제를 살리기 위해 북한 정권이 했던 수많은 실패한 시도 중 하나로만 기억되고 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편집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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