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니 출신 니안 씨 “북 유학 5년은 끔찍”

워싱턴-이수경 lees@rfa.org
2009.09.16
MC: 1980년대 북한의 원산농업대학에서 공부했던 아프리카 유학생이 당시 북한에서의 생활을 책으로 펴낼 예정이어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기니 출신으로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원산농업대학에서 공부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후 지금은 미국에 정착해 살고 있는 알리우 니안(Aliou Niane) 씨는 탈출구가 전혀 없었던 북한에서의 생활을 통해 자유의 소중함과 힘든 환경을 이겨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수경 기자가 니안 씨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질문: 우선 어떻게 북한에 유학을 가게 됐는지 과정이 궁금합니다.

Aliou Niane: 네, 기니의 국민들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자국을 떠나 외국에 가는 일이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메드 세꾸 뚜레(Ahmed Sekou Toure) 대통령이 고 김일성 주석의 생일을 맞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세꾸 뚜레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과 면담에서 기니 학생들을 북한에서 공부시키기로 합의했고, 앞서 국비 유학생을 신청했던 저는 북한에서 공부할 기니 유학생 10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발된 것입니다.

질문: 북한 유학생으로 선발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Aliou Niane: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국비 유학생을 선발하는 모든 과정이 비밀이었고 누가 어느 나라로 가는지 아무도 몰랐으니까요. 다만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동유럽이나 쿠바로 떠나기 때문에 저 역시 그들 국가로 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북한에 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북한은 아프리카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였고 중국과 일본 근처에 있는 사회주의 나라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북한에서 공부하기 싫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주변의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는 북한보다는 동유럽 국가에 가고 싶다고 저의 본심을 털어놨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지요. 국가에서 가라고 하면 가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질문:
당시 나이가 몇살이었습니까?

Aliou Niane: 22살이었습니다.

질문: 북한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Aliou Niane: 북한은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매우 힘든 국가였습니다. 심지어 북한내에서도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했습니다. 가끔 제가 다니던 원산농업대학에서 평양에 가곤 했는데 그 때마다 당국의 허락을 받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봉사원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항상 저와 다른 기니 유학생들을 쫓아다니며 감시했습니다. 매일 수업에 들어가고 나가는 시간을 기록할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질문: 자유롭지 못한 북한에서의 유학 생활이 힘들지는 않았나요?

Aliou Niane: 힘들었습니다.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기니에서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는 자유는 있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당시 원산농업대학에서 공부하던 기니 학생들과 다른 아프리카 학생들 모두 이동의 제약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어떤 외국 유학생은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고 일부 학생들은 항상 술을 마셨습니다. 저는 매일 울었습니다. 북한에서의 5년은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많이 울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언젠가는 북한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하루는 너무 길었고 5년이란 세월을 보내는 것은 무척 힘들었습니다.

질문: 북한에서의 힘든 유학 생활을 위로해 줄 즐거운 놀이 문화는 없었습니까?

Aliou Niane: 없었습니다. 북한에서는 흔히 아프리카나 남한, 일본, 미국의 대학생들이 일반적으로 즐기는 놀이 문화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북한 학생들에게 유일한 놀이 문화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입니다. 저도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곤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김일성 주석의 일대기나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혁명 영화 등 사상적인 내용으로 몇번 보고 나니까 더이상 흥미롭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잠비아와 탄자니아 유학생들이 라디오를 구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몇달 후 방을 같이 쓰던 기니 친구가 드디어 일제 라디오를 구해왔습니다. 우리는 그 라디오를 통해 ‘라디오 프랑스 인터내셔널’이나 ‘BBC 방송’을 듣고 외부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유학생들은 식사시간에 모여 라디오에서 들은 소식을 서로 얘기하고 나누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북한에서의 유학생활 2년만에 한국말을 조금 알아듣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남한의 FM 춘천 방송을 가장 즐겨 들었습니다. 당시 남한 방송을 통해 들었던 가요들은 아직도 좋아합니다.

질문: 북한에서 외국 방송이나 남한 방송을 청취하다 발각됐을 경우 처벌받지는 않나요?

Aliou Niane:
당시 함께 방을 쓰던 북한 학생이 제가 남한 방송을 들을 때마다 라디오의 전기 플러그를 뽑으며 저지하곤 했습니다. 그 북한 학생은 방을 함께 쓰는 룸 메이트(방 친구)이면서 동시에 저를 감시하는 역할도 했는데요, 예를들면 제가 김일성 주석의 사진에 절을 하는지, 몰래 남한 방송을 듣는지 등을 감시하고 잔소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외국 유학생이었기 때문에 외국 방송이나 남한 방송을 듣는다고 해서 추방되거나 처벌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사진에 절하는 일도 한 일년 정도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질문: 북한에서의 유학생활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나요?

Aliou Niane:
그런 생각은 못했습니다. 우선 당시 기니는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온 국비 유학생을 받아주지도 않았을 뿐더러 북한을 빠져나갈 방도도 없었습니다. 우선 원산에서 비행기를 탈 방법이 없었습니다. 돈이 있다고 해도 비행기 표를 어디서 어떻게 사야하는지 정보가 전혀 없었습니다. 북한은 마치 감옥과 같았습니다. 탈출구가 없었으니까요.

질문: 북한 학생들과는 어떻게 지냈나요? 친한 북한 친구가 있었습니까?

Aliou Niane: 지금 생각하면 북한에서 5년동안 대학에 다녔지만 북한 친구는 한명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북한 학생들은 외국인 유학생들과 자유롭게 얘기하는 일이 금지됐기 때문입니다. 오직 허가를 받은 일부 학생들만이 우리와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혹시 제가 교정에서 다른 북한 학생과 대화를 하려고 해도 상대방은 빨리 대화를 끝내려고만 했습니다. 북한 당국은 외국인 유학생과 북한 학생들 간의 교류를 통해서 외부의 정보가 유입되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동시에 북한 내부의 사정이 외국 유학생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막았습니다.

질문: 원산 농업 대학에서의 수업 체계나 지도 방법은 어땠습니까?

Aliou Niane:저는 원산농업대학의 농업 경영학부에서 농업 집약화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지금도 저에게 좋은 교육을 시켜준 북한의 원산농업학교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농업 교육은 이론적으론 완벽합니다. 북한의 농업을 발전시키고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북한의 교수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효과적인 농작물 생산을 위해서는 충분한 비료와 농기계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비료와 농기계 마련을 위해 국가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북한이 모든 자본을 군대보다는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한다면 북한의 농업은 빠른 시간내에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북한 사회는 매우 조직적이고 통제가 가능하며 북한 주민들은 훈련이 잘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 방금 말씀하신 그런 개인적인 견해를 수업 시간에도 얘기해 본 적이 있나요?

Aliou Niane: 물론입니다. 그러나 외국인 유학생들이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 질문할 때마다 교수들은 대답을 회피 합니다. 만일 어느 북한 교수가 북한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군대보다는 비료나 농기계를 사는 데 돈을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 교수는 사형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대학에서 과학적 진리를 논의할 때도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곳이 북한입니다.

질문: 니안 씨가 북한에서 유학한 이후에도 기니의 학생들이 북한에서 계속 유학했나요?

Aliou Niane: 아닙니다. 저를 포함해 당시 북한에 유학했던 10명의 학생들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니 유학생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외에 당시 원산농업대학에는 잠비아와 탄자니아, 에디오피아 등에서 온 여러 아프리카 학생들이 있었고 캄보디아 학생들도 공부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질문: 북한에서의 유학생활에서 배운 점은 무엇입니까?

Aliou Niane:
아직도 북한에서의 생활이 생생하게 마음 속에 남아 있는데요, 저는 북한에서의 생활을 통해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목표를 잃지 않으면 언젠가 이루어 진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제가 북한에 처음 도착했을때 저는 5일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5년이란 더욱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5년을 지냈고 학위도 받았고 살아서 북한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국인 기니에서부터 제가 그토록 원했던 자유를 위해 북한에서 일본으로 유럽을 거쳐 지금은 미국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자유를 잃어보지 못한 사람은 자유의 소중함을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앞으로 북한에서의 생활을 담은 책도 발간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Aliou Niane:
네 ‘북한에서의 나의 인생 (My life in North Korea)’이라는 제목의 책을 프랑스 말로 집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북한에서 경험했던 일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고, 무엇보다 제가 사랑하는 북한과 북한 사람들을 위한 책이 되기를 바랍니다.

네 지금까지1980년대 북한의 원산농업대학에서 공부했던 아프리카 유학생 알리우 니안(Aliou Niane) 씨와의 회견을 보내드렸습니다. 회견에 이수경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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