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금지·벌금·상납금 ‘코로나 삼중고’ 겪은 러시아 내 북 노동자
2023.11.28
앵커: 북한과 러시아가 경제 분야까지 협력의 범위를 넓히고 있어 향후 러시아 파견 노동자를 통한 북한의 외화벌이가 활성화될 지 주목됩니다. 다만 이런 상황과 맞물려 북한 노동자들의 인권 침해가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됩니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이 최근 입수한 러시아 주재 북한 건설회사의 문건에 따르면 북한 노동자들은 코로나 사태 기간 귀국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러시아 당국의 노동금지 조치, 본국에 대한 상납금 압박 등 ‘삼중고’를 견디고 있었습니다. 코로나 시기 러시아 내 북한 노동자들의 인권 실태와 향후 전망에 대해 서울에서 목용재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지난 2020년 9월, 러시아 하바롭스크 주재 북한 제1건설회사의 생활총화.
초급당위원장은 노동 허가 없이 일하다 러시아 당국에 단속돼 약 22~28달러(2000~2500 루블)의 벌금 처벌을 받은 노동자들에게 “보다 은밀한 방법으로 로동활동을 벌여 당에서 맡겨준 경제과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에 “그러면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숨어서 일을 해야 되는가”라는 한 노동자의 거센 반발이 이어집니다.
이는 최근 자유아시아방송(RFA)이 입수한 ‘로련 하바롭스크주재 제1건설회사 로동자 000의 사상동향에서 제기된 문제’라는 문건의 일부분으로 당시 북한 노동자의 불만이 상당히 누적돼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유엔 안보리와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 등에 따르면 취업비자를 가진 북한 노동자의 수는 2017년 12월 기준 3만여 명에서 2019년 3월 기준 4000명 미만으로 감소했습니다. 하지만 북한 노동자들은 대북제재 이후에도 관광, 유학, 기술연수 명목의 비자를 받아 파견됐기 때문에 명확한 수는 추산하기 어렵습니다.
북한인권정보센터(NKDB)가 지난 2015~2016년 사이 펴낸 단행본 등에 따르면 러시아로 파견된 북한 노동자는 모스크바, 하바롭스크,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파견돼 건축, 수산, 무역, 임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외화를 벌어 북한 당국에 바쳐왔습니다.
‘코로나 삼중고’ 겪은 러시아 내 북 노동자
이렇게 파견된 북한 노동자들은 코로나로 매우 열악한 상황을 견딘 것으로 보입니다. 귀국할 수 없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단속을 피하며 상납금까지 마련해야 하는 ‘삼중고’를 겪은 셈입니다.
북한의 하바롭스크 주재 1건설회사가 지난 2020년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문건들에는 코로나 시기 북한 노동자들의 고충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해당 문건에는 “(2020년) 6월 22일 하바롭스크변강 이민국에서 교육사증으로 들어온 조선사람들은 6월 19일부터 로동활동을 할 수 없다고 정식으로 선포했다”는 내용과 “코로나전염병이 해제돼 (북한이) 국경을 열어놓으면 로씨야에서 나가야 한다”는 등 러시아 이민 당국의 통보가 담겨 있습니다.
이에 1건설회사의 노동자들은 2020년 7월경부터 경찰의 단속을 피해 숨어 다니며 3명, 5명씩 소규모로 러시아인들의 개인 청부를 받아 일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 노동자들은 소규모 단위로 벽체미장 작업을 진행하던 중 사복 경찰에 의해 단속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1건설회사 측은 “인권유린”이라며 항의했고 러시아 정부는 “다시 단속되면 조서를 쓰고 벌금을 물려 행정법위반으로 처리할 것”이라는 입장을 강조합니다.
강동완 동아대 교수는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코로나 초반에는 러시아 당국이 북한 노동자들에 대한 대북제재를 어느정도 준수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어쨌든 대북제재로 북한 노동자들을 송환하는 움직임은 보였다”고 평가했습니다.
강동완 동아대 교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중심가의 건설장에서 북한 노동자들을 거의 찾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2020년 초반에도 그랬고요. 제가 2021년 4월 갔을 때도 도심에서 북한 노동자들을 찾기는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코로나로 건설경기가 많이 위축돼 있었지만 북한 노동자들이 공개적으로 보이는 장소에서 대규모로 건설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으로 1건설회사 노동자들의 불만은 상당히 누적됐던 것으로 보입니다.
문건에는 “두나라 정부사이에 문제를 해결하든가, 조국으로 귀국해야 한다”, “조국 책임일군들은 생산실적을 올리는데만 신경쓰면서 재외 사람들의 생명안전에 대하여서는 무관심하다”, “조국에 통지해 소환조직해 달라”, “조국과 전화련계를 해달라”는 등의 문제 제기 내용이 담겼습니다.
최근 러시아 내 북한 노동자 출신 탈북민들을 심층 조사한 바 있는 서보배 북한인권정보센터(NKDB) 연구원은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코로나 이후 노동자들의 불만이 고조된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서보배 북한인권정보센터(NKDB) 연구원: (코로나 전에는) 북한에 있는 가족과 서신이라도 교환하게 해주는 등 안부가 조금 가능했었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이 번 돈의 일정 부분은 송금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들이 완전히 봉쇄되니 내부에서 불만이 많이 높아졌고…
북 노동자들, 손에 쥐는 돈은 사실상 ‘0’…짬내서 부업해야
코로나 시기에도 북한 노동자들은 지속적인 착취를 당했습니다.
지난 2017년부터 2020년 6월까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한 김혁(가명, 2021년 3월 입국) 씨는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4년여 동안 공식적인 노동으로 벌어들인 돈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상납금이 한 달에 약 560달러(5만 루블)였고 숙식비 명목으로 약 110달러(1만 루블)를 추가로 떼여 사실상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거의 없었다는 겁니다. 아침 8시 30분부터 새벽 2~3시까지 일을 하는데, 정작 자신의 임금은 회사 사장의 몫이었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김 씨는 “한 달 임금이 많이 벌 때는 약 1470~1690달러(13~15만 루블)였다”며 “사장은 상납금과 생활비, 여기에 우리 작업에 문제가 발생해서 돈으로 메워야 한다는 등의 구실로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임금을 받지 못한 김 씨는 파견 생활 내내 현지 아파트 의류수거함과 쓰레기 등에서 옷과 신발 등을 주워 사용했습니다.
김 씨는 이런 구조에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부업 밖에 없었다며 “친분이 생긴 현지인에게 일거리를 요청해 아무도 모르게 돈을 조금씩 벌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김 씨가 지난 2019년부터 2년여 간 부업으로 번 돈은 고작 약 500달러(4만 5000루블)였습니다.
지난 1995년 러시아에 파견돼 2021년까지 체류한 탈북민 박진철(가명, 2021년 입국) 씨는 북한 관리자들의 착취를 견디지 못해 1998년 작업 현장을 이탈,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2021년까지 일을 하며 연명했습니다. 회사 소속으로는 돈을 한 푼도 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탈한 것이었습니다.
박 씨는 “돈을 벌어서 돌아가려 했는데 여권을 살리는 비용과 현장을 이탈한 것을 무마해주는 비용 등을 떼면 수중에 남는 돈이 없었다”며 “그래서 돌아가지 않고 현지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고 말했습니다.
서보배 NKDB 연구원은 북한 해외 노동자들 대부분이 임금을 지급받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특히 코로나 시기 러시아 건설 부문에 파견된 노동자들의 한 달 임금은 1500~2000 달러 정도인데, 이 중 직접 손에 쥐는 금액은 100달러도 미치지 못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 상당수가 부업이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음에도 정규 노동 시간을 피해 부업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서보배 NKDB 연구원: (노동자가) 귀국할 때 정산해주겠다는 명목으로 수표 형태로 지급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현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부업을 찾는 것입니다. 러시아 내에서도 몰래 핸드폰을 활용하다 보면 아르바이트 공고와 같은 플랫폼을 활용해서 일거리를 찾은 뒤 정규 노동시간 외에 추가적으로 일하며 돈을 조금 버는 식으로 생활한다고 합니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이 최근 입수한 ‘(2020년) 3.4분기 당원들의 당 생활총화에 대하여’라는 문건에도 노동자들이 상납금과 생활비 외에 다양한 명목으로 임금을 떼이고 있었습니다.
김일성 사망일에 100달러씩을, 지난 2020년 여름 큰물 피해를 겪은 본국의 어려움을 돕는다며 몇몇 노동자들이 1200달러를 모아 본국으로 보냈습니다. 지난 2020년 9월 태풍 피해 발생 시 김정은 총비서가 평양 당원들에게 피해 복구를 독려하는 서한을 공개한 뒤에는 “나도 수도평양 핵심당원”이라며 상당수 노동자들이 4546달러를 모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문건에는 ‘기부’로 표현됐지만 사실상 당국에 의해 임금을 추가로 떼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강동완 교수는 “북한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가장 큰 인권 유린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강동완 동아대 교수: 아무리 일을 해도 그 수입이 본인 것이 아니고 충성자금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에 귀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큰 인권 침해 상황이라고 할 수 있고…
강동완 동아대 교수와 자유아시아방송과의 인터뷰 동영상. /RFA Photo - 이은규
북러관계 밀착…단속 및 비자발급 완화되나?
북한 관영매체에 따르면 북한과 러시아는 지난 16일 평양에서 10차 북러 경제공동위원회 회담의 결과물인 의정서에 조인했습니다. 무역, 경제 및 과학기술 협조 촉진이 골자였습니다. 이에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 노동자 파견 문제를 논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관측했습니다.
한국의 국가정보원 산하 연구기관인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의 안제노 책임연구위원과 이상근 연구위원도 지난 23일 내놓은 보고서에서 러시아가 자국 내 북한 노동자들의 활동을 묵인하는 방식으로 북한과 비공식 협력을 지속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안제노 책임연구위원과 이상근 연구위원은 러시아가 지난해 10월 편입한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 루한스크인민공화국(LPR), 자포리자주, 헤르손주 등에도 북한이 노동자를 파견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한국 내 전문가들은 최근 북러가 밀착하면서 향후 러시아가 북한 노동자들에 대한 비자 발급을 간소화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무비자 파견 논의가 진행됐다는 주장도 제기됩니다. 강동완 동아대 교수, 서보배 NKDB 연구원입니다.
강동완 동아대 교수: 북러 정상회담 이후 가장 큰 부분이 결국 경제협력 분야라고 할 수 있죠. 이런 부분들을 해결하기 위해 러시아는 북한의 인력을 받기 위한 비자 문제를 수정할 것이고 북한 당국도 바로 이런 부분들을 요구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서보배 NKDB 연구원: (탈북민 증언에 따르면) 관광비자 명목의 발급 과정을 굉장히 간소화했다는 게 올해 초의 얘기였습니다. 아마 무비자 관련해서도 논의가 됐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비자 자체에 대해서 간소화하고 또 무비자에 관해 논의하는 것을 보면 그 이면에는 노동자 파견에 대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향후 북한 노동자들의 러시아 파견이 실제로 확대된다면 그만큼 북한 노동자들의 인권 침해가 더욱 심각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나옵니다.
안제노 책임연구위원과 이상근 연구위원은 “북한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 알 권리 및 정보의 자유 침해, 거주 이동의 자유 침해, 직업선택의 자유제한, 임금 갈취, 재산권 및 건강권 침해 등 심각한 인권 유린을 겪고 있다”며 “이들이 전쟁으로 황폐해진 곳으로 파견되면 인권침해 정도가 더욱 심해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습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