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 한국의 대표 가곡, '비목'은 한국전쟁의 아픔을 담고 있는 노래로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호국 영령을 기리는 6월이 되면 쉽게 들을 수 있는 가곡인데요. '비목'의 작사가 한명희 씨는 이 노래를 통해 한국 국민들이 전쟁에서 희생된 꽃다운 청춘들을 오랫동안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서울에서 목용재 기자가 한명희 씨를 만났습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지난 1969년 발표된 한국의 국민가곡 ‘비목’의 1절 가사입니다. ‘비목’이란 고인을 기리기 위해 무덤 앞에 세워두는 ‘나무 비석’으로, 이 가곡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무명 전사자의 돌무덤 앞에 세워둔 비의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작사가 한명희 씨가 한국전쟁 정전 12년차인 1965년 강원도 화천 비무장지대(DMZ)의 초소(GP)장으로 근무했던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당시 한 씨는 DMZ에서 녹슨 철모, 부러진 총대, 훼손된 수통, 무명 전사자의 돌무덤 등을 보고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어야만 했던 청춘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전역 이후 TBC 방송국에서 가곡 프로그램 PD(제작자)로 근무했던 한 씨는 장일남 작곡가로부터 새로운 가곡의 작사를 부탁 받게 됩니다. 당시 가곡 중흥 운동을 벌이고 있던 한 씨는 이 같은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고 하룻밤 만에 ‘비목’의 가사가 완성됐습니다.
한 씨는 최근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세상을 떠난 호국영령들이 하고 싶었을 말을 ‘비목’의 가사 형식으로 대신 전달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명희 씨 : (한국전쟁의) 흔적이었습니다. 초소장 근무 당시 제 나이가 20대였고 (DMZ 내 전사자들도) 인생의 꽃망울을 피워보지 못한 나이였습니다. 그렇게 그곳에 죽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감수성이 예민하고 정서적으로도 순수할 때 DMZ를 들어갔습니다. 그런 환경을 겪으면 누구나 다 그런 감정이 생기게 됩니다. 참 안 됐구나. 왜 청춘들이 이곳에 와서 해골로, 백골로 누워있어야 하는가, 이런 원초적인 생각을 했죠.
한 씨는 ‘비목’이 처음 공개됐을 당시 투박한 가사로 인해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을 염려했다고 합니다. 본업이 작사가도, 시인도 아니었던 한 씨는 군 생활에서의 경험을 가사에 녹여낸 것이 대중화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겁니다. 처음 ‘비목’을 공개할 때 본명 대신 ‘한일무’라는 가명을 사용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한명희 씨 :부드러운 말이 아닌 것이 들어간 게 많았습니다. '초연', 대포 연기를 초연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그렇고, 2절에 들어간 '홀로 선 적막감'이라는 단어도 부드러운 표현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볼 때는 너무 창피한 겁니다. 그래서 가명을 썼어요. '한일무'라고. 하나 '일'자에 없을 '무'자.
한 씨는 ‘비목’이 한국의 국민가곡으로 여전히 사랑받는 것은 한국 국민 모두가 한국전쟁에 대한 아픔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전쟁을 직접 겪었거나 부모님이 겪은 전쟁의 참상을 전해 들은 경험이 있는 한국인들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노래라는 겁니다.
한 씨는 “‘비목’은 특정인의 작품이라기 보다는 온 국민이 가슴 아파하며 부른 공동의 작품”이라며 “이 노래는 한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물과도 같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한명희 씨는 현재 한국 국민들이 누리고 있는 평화와 번영, 풍요로운 삶의 토대가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청춘들의 희생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명희 씨 :제가 근무했던 지역에서만 몇 만 명이 죽었어요. 조금만 뒤돌아보면 그런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인해 우리가 이만큼 먹고 사는 것입니다. 항상 이들의 희생을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일 년에 몇차례, 가끔은 젊음을 바쳐서 나라를 지켜준 이들 덕분에 이만큼 산다는 것을, 의식 있는 시민들이라면 함께 공감해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이어 한 씨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문화가 한국에도 자리잡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 씨는 “국립국악원장으로 재직할 당시 캐나다로 해외 공연을 간 적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참전 용사들을 영웅으로서 대접하고 있었다”며 “이런 가치관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한국 국민들은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의 시민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서울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목용재입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

다음은 인터뷰 일문일답.
기자 : 가곡 '비목'이 한국의 국민가곡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한명희 씨 :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늘 하는 답변이 있습니다. '비목'은 온 국민의 공동, 합동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한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국전쟁의 아픈 경험을 직간접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너무 치명적인 비극이었으니까요.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죠. 과거 이런 정서를 승화시킨 노래가 없었는데요. 1969년 비목이 이런 정서를 승화시키니까 온 국민이 공감하며 애창을 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사는 제가 하고, 작곡은 장일남 씨가 했지만 특정인의 작품이라기 보다는 온 국민이 공감하고 아파하면서 부르는 노래로, 국민들이 만들어 주신 노래죠. 한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는 어떤 상징물처럼 된 것입니다.
기자 : 비목이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예상은 하셨습니까?
한명희 씨 : 노래 자체는 1967년 만들어진 것으로 아는데 공식적으로 공개 된 것은 1969년 5월 12일 세종문화회관의 전신인 서울 시민회관에서였어요. 그 이후 이 노래가 대학가에서 유행하기 시작하더라고요. 대학가에서 유행을 하다 보니 경향신문과 같은 언론에서도 주목했고요. 그래서 관심이 높아졌죠. 그러다가 1976년 방영된 TBC 드라마 '결혼행진곡'에서 배우 한진희와 장미희가 만날 때 배경음악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인기가 급상승했죠.
기자 : 당시 드라마에 '비목'이 어떻게 사용된 건가요?
한명희 씨 : 다들 제가 그 당시 TBC PD였으니까 제 입김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아니었어요. 당시 '결혼행진곡' 드라마 작가의 딸이 이화여대를 다녔는데, 당시 이대에서도 이 노래가 유행했었나봐요. 딸이 집에 들어와서 이 노래를 들었는데 드라마 작가가 이 노래를 듣고 드라마에 사용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하더라고요.
기자 : '비목'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한명희 씨 : 무덤 앞에 돌로 세우는 것을 '비석'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돌 대신 나무로 만들어 세우는 것은 '목비'라고 해요. 그런데 노래 제목을 '목비'라고 부르면 너무 건조하고 어감상 좋지도 않아서 제가 거꾸로 뒤집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중에서는 '비목'의 의미를 '슬픈 나무'로 해석하기도 하더라고요. 그만큼 청취자들은 이 노래를 슬프다고 느낀 거죠. 사전에도 없는 단어였습니다. '비목'은 호국영령들이 하고 싶을 것 같은 이야기를 제가 메시지로 전달한 것입니다.
기자 : '비목' 가사는 어떻게 쓰신 건가요?
한명희 씨 : 제가 학군군간부후보생(ROTC) 2기인데요. 1964년에 임관했습니다. 그때 비무장지대(DMZ)라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남방한계선 펫말, 군사분계선 정도 깔려 있었어요. 인민군이랑 서로 악수하고 과자도 나눠 먹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DMZ를 제가 자원에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전쟁의 참상이 그대로 널브러져 있는 거에요. 부러진 총대, 탄피, 굴러다니는 철모, 망가진 수통 등이 막 굴러다니는 겁니다. 그게 다 뭡니까. 그 흔적이. 20대 젊은 인생, 꽃망울도 피워보지 못한 20대들이 그렇게 죽어 있는 거 아닙니까. 제가 그때 정서적으로 순수할 때 그곳을 들어갔는데요. 누구나 다 그런 환경을 겪으면 그런 감정이 다 있습니다. 참 안 됐구나. 청춘들이 왜 이곳에 해골로, 백골로 누워 있어야 하는가, 이런 원초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사, 이런 것도 생각하게 되고 어떻게 죽는 것이 보람 있을까란 생각, 또 국가는 소중하다, 나라가 허약하면 청춘들이 저 꼴이 되는구나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생이 무엇인가를 은은하게 체험으로 느낀 곳이 비무장지대였습니다. 조금만 뒤돌아 보면 이런 희생, 젊음의 위에서 우리가 이만큼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1년에 가끔은 젊음을 바쳐서 나라를 지켜준 사람들 덕분에 이만큼 산다는 것을, 인식 있는 시민들이라면 이 정도는 공감해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기자 : 군 생활을 통한 경험을 '비목' 가사로 쓰신 것이군요?
한명희 씨 : 제가 TBC PD를 할 때 가곡 중흥 운동을 하면서 한국의 가곡을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했어요. 가곡 100곡을 방송하고 나니까 더 이상 방송할 곡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신곡 만들기 운동을 진행했죠. 당시에는 제가 신문사나 잡지에 글도 기고했었거든요. 그런데 장일남 작곡가가 저한테 글을 곧잘 쓴다고 가사 하나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시인도, 작사가도 아닌데 썼다가 욕을 먹으면 곤란하다고 거절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너무 부탁을 해서 그때 숙직실에서 하룻밤 만에 가사를 썼습니다. 그 다음날이 노래 녹음하는 날이었거든요. 즉석에서 빨리 쓰다 보니 옛날에 소대장을 할 때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담은 거죠. 그런데 시에서 쓰는 단어나 부드러운 말이 아닌 게 많이 들어간 거에요. 대포 연기를 의미하는 '초연', '홀로 선 적막감'이런 표현도 부드러운 가사라고 할 수 없잖아요. 제가 봤을 때는 너무 창피한 겁니다. 그래서 '한일무'라는 가명을 당시에 썼죠. 그래서 옛날 음악 교과서에는 한일무 작사, 장일남 작곡으로 나와요. 하나 '일'자에 없을 '무'자를 썼는데 제가 비무장지대 근무할 때의 느낌을 가명으로 정한 것이었죠.
기자 : 정전 70주년인데 세상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까요?
한명희 씨: 우리가 한 때 세계화를 많이 얘기 했었습니다. 우리가 세계화를 하려면 그 가치관을 공유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 세계시민이 될 만한 가치관을 갖지 못했습니다. 나라를 지켜준 군인에 대한 존경과 같은 인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국립국악원장으로 재직할 때 캐나다에 공연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저희 공연에 참전용사들이 정장 차림으로 훈장을 달고 참석했는데 캐나다 국회의원, 시장 등의 사람들이 이들에게 공손하게 영웅대접을 해주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은 큰 문화행사 같은 게 있으면 참전용사들을 초청하지 않잖아요. 초청한다고 하더라도 인사만 하고 끝나죠. 다들 기관장, 정치인들만 대접합니다. (해외 선진국에서는) 희생하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고 대접해 주는데 한국도 이런 가치관을 공유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세계시민이 될 수 없습니다. 꼭 군인이 아니더라도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 덕분에 우리가 이만큼 살 수 있는 것이란 걸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