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독제까지 버려진 세네갈 북한대사관
2024.08.14
앵커: 북한은 지난해 세네갈, 기니, 스페인(즉, 에스빠냐), 앙골라 등 여러 곳에서 해외공관을 철수했습니다. 지난 5월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세네갈을 방문해 북한 외교관들이 모두 떠난 대사관 부지 내부를 방문할 수 있었는데요. 자세한 내용 박재우 기자가 보도합니다.
월세 약 4천 달러의 2층 건물
지난 5월 21일,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 알마디에 위치한 북한 대사관 건물을 찾았습니다.
붉은색 흙먼지가 자욱하게 날리는 비포장도로 앞, 2m 높이의 담벼락 너머로 흰색 3층 건물이 보입니다.
그 앞에는 폐타이어와 각종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고, 자동차들이 무질서하게 주차돼 있습니다.
대문 옆에 있던 북한대사관 간판과 게시판의 홍보물들은 모두 사라졌고, 건물을 임대한다는 안내문만 남아 있습니다.
북한 대사관이 지난해 11월 이곳에서 철수한 이후 6개월째 세입자를 찾지 못해 폐허가 된 모습입니다.
[기자] 지난해 11월 북한 당국은 세네갈, 기니, 스페인(즉, 에스빠냐), 앙골라 등 여러 곳에서 해외공관을 철수했습니다. 대북제재 강화로 외화벌이에 어려움을 겪자, 공관 철수를 결정했단 분석이 나옵니다.
취재진이 대사관 앞에서 촬영을 하던 중 갑자기 대사관 문이 열렸습니다. 건물 관리인이 안에 들어가보라며 문을 열어 준 겁니다.
대사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야외 수영장, 지금은 물이 없이 먼지와 찌든 때만 가득했습니다.
또 마당에는 제멋대로 자란 풀들이 서로 엉켜있고, 창틀을 타고 올라간 담쟁이덩굴은 창문을 거의 덮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억압받는 국가인 북한의 외교관들과 가족들은 이역만리 떨어진 이곳에서 자유롭게 생활했을까?
2019년 한국으로 탈북한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대리는 자유아시아방송과 인터뷰(6월12일)에서 해외에서 생활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북한보다 자유롭다고 설명했습니다.
[류 대사] 북한 내부에서는 토요 학습을 비롯해 금요 노동이라고 해서 금요일에 계속 노동을 합니다. 그리고 봄이 되면 모내기, 여름이 되면 김매기, 가을이 되면 또 추수, 이렇게 계절마다 노동이 계속 있거든요. 북한 내부에서 생활은 정말 힘듭니다. 해외에 나와 있으면 인터넷도 마음대로 접할 수도 있고, SNS도 마음대로 할 수도 있고, 그리고 쇼핑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잖아요.
2층 건물인 대사관 본관에는 총 10개의 방이 있었습니다. 또 각 층마다 부엌이 있고, 화장실도 6개나 됐습니다. 사무실 용도로 보이는 칸막이도 설치돼 있습니다.
건물 관리자는 1층은 응접실과 부엌, 2층은 사무실과 살림집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건물의 월세는 세네갈 현지 화폐로 250만 세파프랑(CFA), 미화로 약 4천 달러인데, 이 정도 건물이면 월세가 매우 저렴한 편이란 게 이 관리자의 설명입니다.
북한은 1972년 9월 세네갈과 처음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같은 해 11월 상주공관을 개설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장소에 있다가 이 건물로 북한 대사관이 들어온 건 5년 전인 2018년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1월에 멈춘 ‘북한 달력’, 한글로 적힌 메모
6개월 넘게 방치된 대사관 내부는 먼지와 쓰레기로 가득했습니다.
가장 먼저 북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던 건, 방마다 걸려 있는 북한 달력. 자신들이 언제 떠났다는 것을 알려주듯 달력 대부분은 11월에 멈춰 있었습니다.
지난해 12월 한국 외교부는 북한이 세네갈과 기니, 네팔, 방글라데시, 스페인과 앙골라, 우간다 등 7개 나라에서 공관을 철수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달력에는 ‘김정일, 김일성, 김정은’이 적힌 문구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류 전 대사대리는 각 대사관의 달력은 북한 외무성에 요청해 외화를 주고 구매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류 대사] 달력은 기본적으로 외무성에서 연말에 북한 대사관들에서 필요한 갯수만큼 요구되는 수량을 받습니다. 이를 토대로 외국 출판사들이 의뢰를 합니다. 그러면 출판사에서 달력을 만들어서 해외에 주재하고 있는 대사관들에 외화를 받고 파는 거죠.
그러면서 그는 달력에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관련 문구가 있다 해도 초상화처럼 취급하지는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또 버려진 대사관 건물 곳곳에는 대사관 직원들의 삶이 녹아 있는 흔적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강봉건강식품공장에서 만든 '살구씨 율무차’, 정성종합공장에서 만든 ‘인삼 엑기스’, 독극물을 해독하는 ‘해독제’ 등 북한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 식품과 약품의 포장지가 쓰레기와 함께 쌓여 있습니다.
또 취재진이 찾은 휴대용 TV/DVD 록화기는 ‘하나 전자합영회사’가 만든 제품입니다.
[류 대사] 이런 물품들은 아마도 북한에서 떠나올 때 가지고 온 것들일 겁니다. 그러니까 고향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기본으로 해서 사람들이 짐에다 물품을 넣어 파견될 때 가지고 나오거든요.
또 북한 외교관들이 직접 손으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메모도 눈에 띕니다. '인쇄물품정리 메모'라고 적힌 글귀에는 용지가 얼마나 담겼는지, 어떤 용지로 쓰이는지 등의 갯수와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
이 밖에도 건물의 전기를 조절하는 설비실의 스위치에도 한글이 적혀 있었는데, 대사실의 조명을 뜻하는 ‘조명 대사’, 에어컨을 뜻하는 ‘랭풍기’, 콘덴서를 의미하는 ‘접속구 대사’ 등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떠난 북한 대사… 그리고 곧 철거되는 부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북한 만수대창작사와 함께 ‘아프리카 르네상스’ 조각상을 만든 세네갈 건축가 피에르 구아다비 아테파 씨는 최근까지 북한과 인연을 쌓아 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 2018년 아테파 씨를 평양으로 초청해 인민문화궁전에서 그에게 건축학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아테파 씨는 지난 5월 25일 RFA와 인터뷰에서 세네갈에서 북한 대사관이 철수했지만, 아직까지 북한 노동자들은 이곳에 남아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북한 대사는 올해 4월까지 머물다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덧붙였습니다.
[아테파] 북한은 (아프리카에서) 대사관을 많이 폐쇄하기로 했습니다. 이게 북한 대사 전화번호인데, 그는 이제 이곳에 없습니다. 지난달까지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아테파 씨는 2019년까지 자신의 사무실에 북한 기술자 2명을 고용했지만, 유엔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로 그들과 계약을 취소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대북제재로 인해 외화벌이에 어려움 겪자 북한은 건물에 비해 매우 저렴한 월세임에도 세네갈 대사관을 운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주세네갈 북한 대사관 부지가 있던 이곳은 이제 폐허가 됐습니다.
취재진과 다시 연락이 닿은 건물 관계자는 6개월 이상 임대가 되지 않고 방치됐기 때문에, 지금의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지을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에디터 박정우, 웹 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