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포로 출신 남한입국 탈북자 가족들은 24일 청와대 인근에서 국군포로 송환과 탈북해서 남한에 입국한 그들의 가족에 대한 처우개선을 남한정부에 촉구하는 집회를 가졌습니다.

이날 국군포로 가족과 북한인권 관련 단체 관계자 등은 북한에서 국군포로는 물론이고 그들의 가족 또한 감시와 통제 그리고 미래가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국군포로 가족이 탈북해 남한에 입국했을 경우 일반 탈북자와는 달리 보상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탈북자 출신으로 6.25참전 국군포로 가족모임 대표를 맡고 있는 서영석씨의 말입니다.
서영석: 오늘 저희가 청와대에 온 이유는 이만동씨, 국군포로의 유해입니다. 그 유해를 남한에 가지고 오기 까지 정부는 전혀 도움도 안주고, 유해를 가지고 오니까 여기에 대한 아무 보상도 없었습니다.
진짜 나라를 위해 가장 어려울 때 목숨을 바친 사람들인데, 국가를 위해 싸운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런 보상이 없다는 것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것은 안 된다 이런 식으로 대우를 하면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누가 대한민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는가?
이 집회에 참가한 탈북여성 이연순씨의 경우 2년전 국군포로 출신의 아버지 이규만씨의 유언을 받들어 탈북 후 알고 지내던 조선족에게 무덤에서 유해를 중국으로 가져오는데는 성공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유해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유전자 검사를 하기 위해 엉덩이뼈를 별도로 보관하게 됐고 일이 잘못돼 유골은 중국 공안에게 압수돼 북송당하고 말았다며 아픈 사연을 털어놨습니다.
이연순: 공안에 단속이 되서 아버님 유해 절반만 들여와 하반신 유해만 국립묘지에 안장을 하고 상반신은 정부가 무책임 하게 해서 북송돼 갔습니다.
아버지가 19살 청춘을 바쳐서 국군에 나갔다가 돌아오시지 못하고 아버지 유해가 절반이 북송되어 갔지만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안하고 여기에 대한 사죄 한마디가 없는 것이 진짜 유감으로 생각이 되고 나갈 때는 나라를 위해 나갔는데 죽음으로 돌아오니까 사람이 쳐다도 안보는 것입니다.
이 씨는 아직도 북한에는 국군포로와 그의 가족들이 인권을 유린당하며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며 남한정부가 국군포로 송환에 대해 더욱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연순: 그분들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분들이 지금 70대, 80대 고령입니다. 이제는 생존을 유지하기 바쁜 상태입니다. 그래도 브로커들의 선을 타고 오고는 있지만 여기 와서도 락을 못 누리고 있는 것이 고통스럽고 앞으로 이분들을 하루 빨리 송환해서 모셔 왔으면 좋겠습니다.
또 이분들의 송환 추진도 정부가 해야지 개인이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데 여기에 대해서 정부가 너무도 등한시 하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고 살아있는 국군포로 그들의 인생이라도 여기에 와서 하루를 살더라도 편안하게 살다가 돌아가셨으면 하는 것이 바램입니다.
북한에서는 국군포로들을 43호 문건으로 분류해 특별 관리를 한다고 국군포로의 딸 탈북자 최애순씨는 설명합니다.
최애순: 우리 아버지는 함경북도 고권원 탄광에 배치를 받아다가 다시 평남도 개천군 산봉리 탄광으로 옮겨갔답니다. 거기서 우리 엄마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엄마는 북한 제대군인으로 알았답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하고 나서 43호 포로병으로 분류된 것을 알았답니다. 그래서 결혼식을 하고 산다, 안산다 하다가 저를 낳았는데 아버지가 59년도에 인민들 앞에서 간첩으로 총살을 당했답니다. 아버지가 전향을 하지 않고 장교라서 흥남도 개천군 산봉리에서총살을 했다고 합니다.
2004년 8월 남한에 입국한 탈북여성 최윤희씨는 함경북도 온성군 풍인탄광에서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최윤희: 성함은 최창열. 아버지는 1930년 1월15일 충청남도 아산군 응봉면 동철리에서 태어 나셨습니다. 18세때 군에 입대를 해서 6.25전쟁에 참가해서 포로가 되고 85년도에 갱도 붕괴 사고로 탄광 안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최씨는 그가 북한에서 경험했던 것들은 민주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들일 것이라며 마땅히 남한정부는 이에 대해 보상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입니다.
최윤희: 왜 하필이면 국군포로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하고 싶은 일을 못하나, 대학도 못가고, 군대도 못가고 북한사회에서는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철저히 매장 됐습니다. 북한에서는 저희들을 인간으로 인정을 안 했습니다. 죽이지 못해서 그래서 그냥 노동도구로 쓰는 것이죠.
제가 생각하기에는 어렸을 때부터 늘 아빠 주위에 감시하는 북한 보위부 두 사람이 붙어 다녔어요. 저희 집이 1동 4세대에서 살았는데 옆집도 감시하는 사람이 살았고, 직장 출근을 해도 항상 주변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군포로의 남한입국을 지원하고 있는 납북자가족모임의 최성용 대표는 남한정부가 남북회담서 북한만을 위한 회담을 한 것이 아니냐며 국민의 한사람으로 납북자와 국군포로 문제에 소흘한 것은 유감이라며 깊은 소외감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최성용: 우선 남북대화가 잘됐으면 하는 것이 우리 가족의 바램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북쪽한테만 좋은 합의를 봐주고 국군포로나 납북자 문제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아무런 성과가 없는데 대해서 지금 이 문제를 듣는 국군포로 가족이나 납북자 가족들은 지금 정부 차원에서도 노력의 평가는 있지만 우선적으로 이런 사항이라는 것을 잘 아셨으면 합니다.
한편 남한정부는 6.25 전쟁기간 북한에 억류된 사실이 공식 확인된 국군포로의 수가 1천186명인 것으로 파악하고 그 가운데 생존해 있다고 하는 국군포로는 500명 정도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진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