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6.25는 명백한 남침”-인민군 참전 탈북교수

평양 사범대학 교수에서 북한최고위층 김일성 처가의 가정교사를 지냈으며 40여 년간 북한의 교육 핵심 인사로 활동했던 김현식 교수, 김 교수는 모스크바 교환교수로 있던 지난 1992년 재미 동포인 누나와 비밀리 상봉했다가 북한 보위부에 발각돼 귀국 명령을 받자 한국으로 망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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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나는 21세기 이념의 유목민' 이라는 자서전을 출간했고 지금은 미국 워싱턴 근교에 있는 버지니아 주 조지 메이슨 대학의 연구 교수로 있으면서 북한 선교 활동에 심혈을 기우리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세상, 김현식 교수가 18살 어린나이에 참전했던 6.25 얘기를 들어봅니다.

김 교수는 18살 고급 중학교, 즉 고등학교 2학년 학생시절에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당시 어린 북한군의 눈에도 남과 북의 전쟁 대비는 너무도 큰 차이가 났었다고 회고합니다.

북측은 전쟁준비를 철저히 했고 남쪽은 아무 준비도 안하고 북쪽에서 우리 동족을 쳐 들어오겠는가 했을 겁니다. 남조선은 정말 아무 방비 없이 당했습니다.

당시 김일성의 갑작스런 전쟁 결정에 대해 김 교수는 중국에서 모택동이 중국을 통일했고 9개 나라의 사회주의 국가가 갑자기 생겼고 그리고 남한은 해방 후 좌익과 우익이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던 분위기를 틈타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중국의 모택동 이나 구소련의 스탈린이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고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을 설득시켜서 소련에서는 무기를 중국에서는 군대를 지원 받아 속전속결로 빨리 전쟁을 끝마치려던 계산 이었습니다.

6월25일 새벽 4시 김일성의 특별방송은 이렇게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남조선 괴뢰군이 갑자기 삼팔선 넘어서 침입해 왔다. 할 수 없이 인민군 전체 장병들에게 전쟁에 나갈 것을 지시했다. 그래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린다.

김 현식 교수는 그 유명한 함경북도 어랑청 전투에 배치 됐는데 막상 전쟁을 하다 보니 처음에는 무슨 이런 전쟁이 있을까, 이렇게 쉬운 전쟁도 있나 하면서 남북한의 큰 전력 차이를 보더라도 남측의 전쟁 준비는 전혀 안되어 있어서 이 전쟁은 빨리 끝나겠구나 하고 얕잡아 봤다고 말 했습니다.

역량이 비슷해야 그래도 전쟁이 값이 있지 하나는 유치원 하나는 대학생인데 남조선은 꼼짝없이 당하두만요. 그러니까 3일 만에 수도를 빼앗기죠. 전쟁사에서 자기 수도를 3일 만에 빼앗긴 일이 얼마나 있겠어요?

그러나 미군과 싸울 때 사정이 달랐다고 말합니다. 특히 흑인들은 전쟁 경험이 많아 싸움을 잘했다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전쟁을 하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에 비해 17-18살 이었던 김 교수 또래의 학도병들은 중국에서 온 조선족 소대장의 지휘를 받았는데 어린 병사들이 전쟁 경험이 없고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총을 다룰 줄 모르다보니 소대장은 총보다는 수류탄을 쓰도록 지시를 했다고 전했습니다.

미군과 싸웠는데 야 ! 총을 잘 겨누지 못하니까 나도 수류탄을 미군들에게 많이 던져서 미군들을 많이 죽게 했습니다.

전쟁준비를 철저하게 했던 북한은 왜 이렇게 어린 학생들을 전쟁터로 몰았는지 의문을 가겼다는 김 교수는 북한이 고급 중학교 학생들까지 총동원 시킨 것은 전쟁을 하루 속히 끝내려고 했던 김일성의 속셈이었다고 전했습니다. 학교 선생님도 전쟁이 끝나고 7월에는 학교에 와서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을 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공부하던 책을 교실에 그대로 남긴 채로 전쟁터로 간 것이 바로 그 방증이라고 지적 했습니다.

정말 학생들까지 총대를 메고 전체 전 국민이 군대가 되어서 싸웠으니까 그렇게 남조선이 당한 것 같습니다.

김 현식 교수는 전투 중에 심한 부상을 입게 됩니다. 머리에 파편이 박혀서 중국으로 후송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중국에는 각 사회주의 국가 의과 대학생들이 자원봉사로 나와 있었는데 수술 경험이 없던 이 의대생들이 부상당한 북한군인들을 상대로 수술을 하는 등 북한 부상병들이 이들 의대생들의 실험 대상이었다고 김 현식 교수는 증언 합니다.

머리에 파편이 들어간 환자 25명이 있었는데 의대 2년생들이 사람의 머리를 언제 수술해 보았겠어요? 그러다 보니 마취에서 깨어나지도 못하고 다 죽었는데 그 중에서 나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김 교수가 살아남은 이유는 이렇습니다. 의대생들이 김 교수의 머리를 수술하려고 보니까 파편이 어려운 부위에 박혀 있어서 수술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결국은 포기를 한 것 이었습니다. 김 교수는 머리에 파편 조각이 박힌 채 평양으로 돌아가서 25년 동안 지내다 머리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중국에서 수술을 했다는 것이 거짓으로 드러나 평양에서 파편을 뽑아내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25년 만에 머리에서 파편을 꺼낸 것 이었습니다.

김 현식 교수가 파편 맞아 수술한 머리를 내 보이기에 만져보니 깊이 들어간 상처 자국이 남아있었고 가슴 가까운 팔뚝 위쪽에도 또 하나의 파편 자국이 흉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팔에도 파편을 맞았는데 이 파편이 1cm만 옆으로 비꼈으면 심장을 뚫었습니다. 머리도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갔으면 죽었을 텐데 살았습니다.

북한이 6.25 전쟁을 두고 남한에서 쳐 올라왔다고 하는 억지 주장에 대해 김 교수도 김일성 주석이 6.25 전쟁 발발 전에 한 방송과 북한의 언론 보도를 보고 그대로 믿었는데 그것은 모든 정황으로 보아서 사실이 아니었다고 지적했습니다.

6.25일 새벽 4시 다 잠든 사이에 그 시간을 택했고 특히 6월 달 이니까 농사철에 병사들은 농촌 고향에 농사를 도와주러 갔고 장교들이 휴가를 간 일요일 새벽에 갑자기 쳐들어갔으니까 되겠습니까? 북쪽에서는 남조선 괴뢰군들이 쳐 올라온 줄 알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남조선은 정말 당했습니다.

김 교수는 북한은 하루 속히 중국, 베트남과 같이 개혁 개방하는 길만이 살 길 이라며 북한의 식량난이 10여년 이상 지속되는 것도 북한체제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북한이 토지를 사유화 시켜서 농민들이 의욕을 가지고 일 할 수 있도록 용단을 내릴 것을 촉구했습니다.

각자 자기 토지를 가지고 소출을 너희가 어느 정도 먹고 국가에는 이만큼쯤 내라고 한다면 얼마나 의욕이 나서 하겠습니까? 왜 국가가 틀어쥐고 소출을 못 내게 합니까?

김 현식교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는 인간적으로 매우 가까웠다며 자신이 미국에 와서 글도 쓰고 북한 사정을 알리는 것은 북한이 세계나라와 같이 어깨를 겨루고 잘 사는 나라로 만들기 위한 바램 이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