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정영 기자가 보도합니다.
지난 18일 버마 감옥에서 숨진 강민철은 지난 1983년 버마를 방문중이던 남한의 전두환 전 대통령 일행을 암살하기 위해 폭탄테러를 일으킨 북한 공작원 3명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습니다.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강민철 상위(대위)와 신기철 상위(대위), 진모 소좌(소령)는 1983년 10월 9일, 버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전 대통령 일행이 아웅산 묘소를 참배할 때 원격조정장치로 폭탄테러를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으로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한 21명의 각료들이 숨지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테러직전 숙소로 돌아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이 사건은 북한에 '버마 랑군 폭발사건'으로 알려졌습니다.
아웅산 폭파사고가 일어난 후 북한은 이 사건을 "남조선 안기부가 조작한 자작극"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상부의 지시로 폭탄을 장치했다는 강민철의 증언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노동신문과 중앙방송을 통해 "반공화국 모략사건"이라고 테러사실을 끝내 부정했습니다.
당시 북한이 범행을 부인한 이유는 테러지원국가의 오명을 쓰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분석됩니다.
아웅산 테러가 있던 1983년 당시 아프리카 자이르 공화국 주재 북한 외교관을 지냈던 국가안보전략연구소 고영환 박사의 말입니다.
정영: 아웅산 테러사건에 대해 북한당국이 외교부에 어떻게 지시를 내렸습니까?
고영환: 아웅산테러는 남조선 안기부의 자작극이다. 랑군사건은 공화국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안기부의 자작극이라는 것을 북한외교부의 공식입장으로서 각서를 작성해서 해당 주재국 외무성에 전달하라는 전보가 내려오고...
북한 당국의 테러 지시 부인에도 불구하고 아웅산 폭탄테러 이후 버마 정부는 북한과 국교를 단절하고 이 사건을 북한의 소행이라고 유엔에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과 남한에 굴복한 버마정부가 외교관계를 단절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고영환박사의 말입니다.
북한은 "남조선과 미국의 압력을 받은 버마정부가 외교관계를 단절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외교부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결국 아웅산 테러 이후 북한은 국제적으로 심각한 외교적 고립을 당했을 뿐 아니라 테러국가라는 딱지가 붙게 됐습니다.
그리고, 테러를 감행한 북한공작원들은 쓸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공작원 3명 중 신기철 상위는 범행 현장에서 사살됐고, 조장인 진모소좌와 강민철 상위는 체포돼 버마 현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 진모 소좌는 사형을 당했고, 강민철은 범행사실을 인정하고 사형에서 25년으로 감형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강민철은 북한의 철저한 버림을 받았습니다. 28세에 체포돼 한창 젊은 시절을 타국의 감옥에서 보낸 강민철, 올해는 그가 25년의 형기를 마치는 마지막 해였습니다.
조국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강민철은 버마 수도 양곤 북부의 인세인교도소 정치범 특별수용소에 수감돼 배신에 대한 고뇌와 회의에 시달렸습니다.
지난 2003년 10월 남한의 주간지 <주간조선>은 강민철이 버마 당국에 "북한에 속았으며 석방된다면 제 3국이 아닌 한국에 가서 참회하며 살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과 버마가 외교관계를 복원한 지난해에는 "남북한 어디에도 가기 싫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현지 언론이 보도했습니다.
현지 언론들은 강민철이 북한에 돌아가면 배신자로 죽을 것이고, 한국에 가면 남한 대통령 암살 기도죄로 법정에 회부될 가능성을 들어 남한행도 포기했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조국을 위해 총폭탄이 되라는 수령 맹신주의의 희생물인 강민철은 삶의 한가닥 희망도 없이 타국의 감옥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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