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속 탈북민] ① 환한 미소에 감춰진 슬픈 사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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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 '디아스포라'는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고국을 떠나 타지에서 살아가는 민족 집단을 말합니다. 탈북민도 마찬가지인데요.

한국에는 탈북민으로 구성된 공연 단체인 ‘아리랑 예술단’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유세계를 꿈꾸며 북한에서 탈출했지만, 한국에서는 다시 북한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고 있습니다.

한국의 이동근 사진작가는 지난 10년 동안 ‘아리랑 예술단’과 동행하며 예술단의 화려한 무대와 쓸쓸한 무대 뒤의 모습, 그리고 이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았는데요.

천소람 기자가 카메라에 담긴 탈북민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에 진한 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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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예술단 단원의 모습 / '아리랑예술단:In the Spotlight' 수록사진, photo by 이동근

형형색색 화려한 꽃 자수로 꾸며진 빨간 한복을 입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은아 씨.

하늘색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고 카메라 앞에서 어색한 듯 웃고 있는 명월 씨.

꽃받침을 하듯 한 손을 턱에 갖다 대고 수줍게 미소 짓는 예린 씨.

이들은 모두 탈북민으로 구성된 공연 단체 ‘아리랑 예술단’의 단원입니다. 현재 예술단에는 7명의 탈북민이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5년 11월 1일, 한국의 사진작가 이동근 씨는 탈북민 이은아 씨(신변 보호 위해 가명 요청), 이예린 씨(신변 보호 위해 가명 요청)와 함께 북중 접경 지역인 중국 연변 투먼시 인근 두만강을 찾았습니다.

비행기와 차를 갈아타고 한참을 달려 마주한 곳은 인적이 드문 황량한 강가였습니다.

눈이 소복이 쌓인 강 너머에는 두 사람의 고향 땅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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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 접경 지역 인근 두만강의 모습. /‘아리랑 예술단: In the Spotlight’ 수록 사진, photo by 이동근

[이은아] 두만강에 갔을 때는 겨울이라 물도 다 줄었고,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넘어갈 수 있는 거리였어요. 하지만 갈 수도 없고, 올 수도 없고, 가면 오지 못하고, 여기 있으면 가고는 싶고. 그런 심정이 참 많이 교차했습니다. 가고는 싶은데, 갈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고향 산천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왔습니다.

[이예린] 지금이라도 갈 수만 있다면 가서 제대로 (부모님의) 차례상을 차려드리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까 죄송스럽고…. 아빠 엄마가 너무 보고 싶고 속상해요. 진짜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게 너무 속상해요. 부모님이고 동생이고 꿈속에서라도 만나고 싶은데 꿈에도 안 나타나네요.

탈북민을 알아가는 10년의 세월

이동근 작가가 ‘아리랑 예술단’의 모습을 촬영하면서 탈북민의 이야기를 담기까지 약 10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동근] 제가 이 작업을 시작한 건 아마 2010년 정도 될 거예요. 제가 사람에 대해 관심이 좀 많습니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정체성이 경계에 선 사람들, 정체성이 혼란스럽고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

특히 그는 3만 명 넘게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경계인, 탈북민의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들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었던 건 아닙니다.

[이동근] 우연히 초등학교 동기를 만나게 됐는데, 이 친구가 가수를 하더라고요. 작은 축제 같은 곳에 가서 노래도 부르고, 진행도 하는데, 옆에 북한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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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예술단원이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다. / '아리랑예술단:In the Spotlight' 수록사진, photo by 이동근

이 작가는 그렇게 우연히 ‘아리랑 예술단’을 알게 됐고, 본격적으로 이들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탈북민 개개인의 인생을 사진에 담기 위한 ‘아리랑 예술단’과 동행은 계속됐습니다.

[이동근] 우리가 사람을 찍을 때는 그냥 외형만 찍는 게 아니거든요. 그 시간 동안 사람을 만나는 거죠. 충분히 그 사람들과 같이 교감을 만들어 내고, 친구가 되고, 동료가 되는 상황에서 촬영이 되는 겁니다. 그 시간이 한 10년씩 걸려요.

사진 속 예술 단원은 모두 환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 저마다 아픈 사연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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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 접경 지역 인근 두만강의 모습 / '아리랑예술단:In the Spotlight' 수록사진, photo by 이동근

올해 정착 15년 차인 이은아 씨(신변 안전을 위해 가명 요청)는 ‘아리랑 예술단’에서 진행과 아코디언 연주, 무용, 노래 등 대부분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 씨는 예술단을 처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는 2008년 12월, 북한 설을 며칠 앞두고 중국 단둥에서 여객선을 타고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이 씨의 부모님은 중국 국적의 조선족이었는데, 아버지는 1970년대에 사업차 북한을 방문했다가 북중 간 외교 문제로 국경이 폐쇄돼 돌아가지 못했고, 그의 어머니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으러 북한행을 택했습니다.

가족들은 북한에서 다시 만났지만, 두 번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이은아] 결혼해서 탈북을 시도했습니다. 신랑이 경찰이거든요. 우리 집안은 중국 연고자입니다. 중국 연고자는 경찰과 혼인이 안 돼요. 그런데 결혼해서 신랑이 진급을 못 하게 된 거죠. 그래서 당시에 이혼이냐, 정복을 벗느냐, 두 갈래 길에 서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이혼을 선택했어요. 애들을 데리고 오는 조건으로요. 그래서 탈북을 결심하게 된 거죠.

현재 그의 부모님과 남동생은 한국에, 오빠와 언니들은 북한에, 그리고 친척들은 중국에 살고 있습니다.

“웃고 있지만, 마음으로 울어요”

이동근 작가는 처음부터 모든 촬영이 순조롭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동근]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에 대한 걱정들도 있더라고요. 다른 문제들에 대한 약간의 걱정이나 두려움, 이런 것들 때문에 피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10~15년 가까이 됐는데요. 그렇게 지내니까 처음에는 조금 불편하고 어려웠는데, 그걸 지나면서 진심을 알게 되고 그런 시간을 공유하면서 공감하면서 느끼다 보니 다 이렇게 열어주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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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예술단 단원 이은아 씨가 마이크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리랑 예술단: In the Spotlight’ 수록 사진, photo by 이동근 ** 이예린 씨의 인터뷰는 이동근 작가가 진행한 것을 참고했습니다.

또 한 장의 사진에는 예술단원 이예린 씨가 곱게 틀어 올린 머리에 짙은 화장, 불꽃을 연상케 하는 꽃무늬 한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공연 전 무대 뒤에서 마이크를 들고 찍은 사진입니다.

이 씨는 1997년에 탈북해 6년을 중국에서 떠돌다 한국에 정착했습니다.

그의 고향은 함경북도 최북단에 위치한 온성, 두만강에서 불과 1.4km의 거리입니다.

3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이 씨는 ‘다발성신경염’으로 손발을 움직이지 못하는 엄마를 대신해 집안의 가장이 됐고, 고난의 행군 기간 중국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브로커의 말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게 됩니다.

[이예린] 중국에 가면 돈을 어느 정도 버는데, 엄마 약값도 벌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 말만 믿고 3개월만 내가 고생하고 오자고 생각했습니다. 중국 식당에서 일을 하든, 산에 가서 벌목을 하든 3개월만 일하면 엄마 약값도 벌 수 있고 괜찮아지겠다 싶어서 무작정 따라나섰는데, 그게 인신매매의 길이었어요.

그가 팔린 금액은 중국 돈 8천 위안, 미화로 약 1천 달러였습니다.

[이예린] (집에) 들어갔더니 말도 모르겠고, 농사만 짓는 완전 시골에서 이 사람이 남편 될 사람이라고 하는데 쳐다보면서 엄청 많이 울었어요. ‘내가 이렇게 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닌데, 이런 사람 만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닌데’ 하면서 후회도 많이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거기서 2년 6개월을 생활하면서 제일 힘들게 살았던 것 같아요.

그의 남편은 거의 매일 술을 마셨고, 밤이 되면 자신을 구타하는 날이 계속됐습니다.

[이예린] 일 년 365일 중 안 맞은 날이 거의 없었어요. ‘내가 도저히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나의 길을 찾아야겠다’ 싶어서 무작정 겨울에 눈이 이만큼 허리까지 왔었어요. 2000년도에 그 허리까지 온 눈길에 길도 못 찾고 논두렁으로 도망쳐서 온 곳이 청도였어요.

우여곡절 끝에 이 씨는 베트남(윁남)과 캄보디아, 태국을 거쳐 마침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됩니다.

한국에서 가족의 소식을 수소문했지만, 전해진 건 어머니와 동생의 사망 소식이었습니다.

브로커를 통해 남은 가족을 한국으로 데려오려 했지만, 아버지와 여동생이 두만강을 넘다 실종됐다는 소식을 들은 지도 10년이 넘었습니다.

[이예린] ‘살아 계셨으면 좋겠다’ 그러고 있지만, 아직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제가 그래서 전화번호도 안 바꾸고 있거든요. 언젠가는 내 전화번호를 아니까 (연락이) 오지 않을까… 그런데 이제는 돌아가신 것 같아요. 연세가 있으니까.

현재 이예린 씨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딸과 함께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두만강에서 드린 제사와 유일한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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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 접경 지역 인근 두만강의 모습. /‘아리랑 예술단: In the Spotlight’ 수록 사진, photo by 이동근

이동근 씨는 탈북민을 촬영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2015년에 이은아 씨, 이예린 씨와 함께 두만강을 방문했던 때를 꼽습니다.

당시 이들이 두만강을 찾은 이유는 탈북 도중 숨진 이예린 씨 아버지의 노제를 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동근] 기억에 많이 남는 순간은, 제사를 지냈을 때입니다. 제사 지내고 나서 예린이와 인터뷰를 하는데 너무 울어서 인터뷰를 제대로 못 했습니다. 자기도 울고 나도 울고 하니까…

[기자] 이예린 씨는 제사를 처음 지냈겠네요.

[이동근] 그렇죠. 중국에서 탈출한 뒤 처음 간 거죠. 마음이 많이 아프죠. 가족들이 다 돌아가시고. 그런 아픔들이 다 있더라고요.

현재 이예린 씨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가족사진은 2002년에 촬영한, 자신이 없는 반쪽짜리 사진입니다.

[이동근] 2~3년 전에 예린이가 연락이 와서 사진을 한 장 만들어 달라고 하더라고요. 가족 사진인데, 2002년도가 찍혀 있더라고요. 그때 자기가 중국을 떠돌고 있을 때였어요. 자기는 없고, 동생 둘과 엄마 아버지가 있는 사진인데, 그걸 아주 어렵게 구했대요. 그 사진 안에 자기 얼굴 좀 넣어달라고 하더라고요. 다 돌아가시고 없으니까.

[이예린] 가족사진이 갖고 싶어서 소중히 갖고 있는 사진, 딱 한 장. 그게 유일한 저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 사진이에요. 어렵게 구한 사진이라 소중하게. 이 세상에 딱 한 장 남은. 보고 싶을 때마다 가끔 꺼내보는 사진…. 그런 사진입니다. 이제 눈물이 다 말랐나 봐요. 안 나와요.

인터뷰 내내 열정이 넘치는 모습을 보인 이동근 작가는 이예린 씨의 사연을 소개하면서 애써 쓴웃음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가리는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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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꽃다발이 떠내려가고 있다. /‘아리랑 예술단: In the Spotlight’ 수록 사진, photo by 이동근

RFA 자유아시아방송 천소람입니다.

에디터 노정민, 웹팀 김상일

사진 교체: 위의 사진 중 일부를 내부 사정에 의해 바꿨음을 알려드립니다. (2023/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