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 해안에서 잇달아 발견된 북한의 고기잡이 어선. 많은 사람들이 이 배를 '유령선'이라 부릅니다. 오직 돈벌이를 위해 변변한 장비 하나 없이 작은 목선에 몸을 싣고 망망대해 바다로 뛰어진 북한 어부들은 거친 바다와 싸우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몸과 목선이 하나가 되어 바다를 떠돌게 되는데요.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일본 현지에서 집중 취재한 북한의 소형 고기잡이 어선의 표류 문제와 실상을 2회에 걸쳐 전해드립니다. '특별 기획: 항구로 귀환하지 못한 채 떠도는 북한 유령선' 오늘은 두 번째 시간으로 강에서나 띄어야 할 배로 바다에서 조업 중인 북한 어부의 현실을 전해드립니다. 보도에 박정우 기자입니다.
일본 이시카와현 시카정 지역에서 40년 넘게 어부로 살아온 카나모리 미쯔오(73) 씨의 하루는 바다와 함께 시작됩니다.
지난 1월 중순 마을 앞바다에서 양식중인 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바닷가에 나간 카나모리씨는 해안가에 검은 물체가 떠밀려 온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카나모리 미쯔오: 이 지역은 김을 많이 기르는데 당시 한창 수확기였습니다. 오전 8시30분 쯤이었을 겁니다, 김 상태를 확인하려는 데 바닷가 바위 위에 올라가 있는 목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카나모리씨는 배 주변에 혹시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 싶어 간담이 서늘해졌습니다. 곧 이어 지역 경찰 3명이 현장에 도착했고 배 안과 주변을 수색한 뒤 빈 배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카나모리 미쯔오: 섬뜩한 느낌이었습니다. 이전에 밀려온 배에는 사람도 타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근처에 시신도 없었고 배만 발견됐습니다. 지역 주민들도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구장도 맡고 있는데 구민들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배 바닥 편편해 큰 파도에 쉽게 뒤집히는 구조"
"먼 바다 나올 의도 없었을 것…항해 준비 안돼"
경찰 조사 결과 북한에서 표류해온 어선으로 판명됐지만 카나모리씨가 더 놀란 건 북한에서 떠내려온 배라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배가 도저히 바다를 항해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낡고 작은 데다 배의 구조 역시 이상했기 때문입니다.
카나모리 미쯔오: 상식적으로 여기까지 올 생각은 없었을 겁니다. 그 배로는 먼 바다에 나올 수 없습니다. 배 바닥이 V형태로 돼 있지 않고 편편했는데 파도에 견딜 수 없습니다.
카나모리씨는 바닥이 편편한 배는 큰 파도가 오면 쉽게 뒤집히는 구조라며 바다가 아니라 강에서나 탈 수 있는 배라고 말했습니다. 애초 바다에서 선원들의 안전을 지켜줄 수 없는 상태였던 겁니다.
경험 많은 어부가 예리한 눈썰미로 단번에 파악해낸 것처럼, 바다에 나갈 준비가 안 된 배는 높은 파도와 거친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난파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지난 1월 10일 이시카와현의 수도 가나자와시 해안가에 떠밀려온 북한 목선 역시 이런 운명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이 지역 일간지 '호코쿠신문' 사회부의 야치 슌스케 기자는 검은 목선 1척이 뒤집힌 채 해안가 모래에 박혀 있었다고 당시 목선 발견 현장을 회고했습니다.
야치 슌스케: 목선이 뒤집힌 채 바로 이 앞에 떠밀려 와 있었고 10미터쯤 옆에서 남자 시신 1구가 발견됐습니다.
시신 8구 발견…'송도원공장 사탕' 봉지도
부검 결과 지난 해 9월 사망, 4개월 떠돌아
하지만 이 날 발견된 목선은 7구의 남자 시신을 더 품고 있었습니다.

야치 슌스케: 첫 발견 당시 높은 파도 탓에 제대로 수색할 수 없었는데요 엿새 뒤 선체 내부 수색 과정에서 시신 7구가 추가로 발견됐습니다.
야치 기자는 당시 목선 안에서는 '송도원종합식료공장'에서 제조한 '과일향 사탕' 봉지가 발견되는 등 북한 어선으로 추정할 만한 단서들이 다수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9일 RFA, 자유아시아방송이 찾은 가나자와시 앞 바다에는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산산히 조각난 목선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배 안쪽에는 파도에 쓸려온 모래가 가득 쌓여 있었고 배의 부력을 높이기 위해서 선체 사이사이에 끼워 넣은 스티로폼이 부러진 나무 널빤지 밖으로 흉물스럽게 드러나 있었습니다. 매섭기로 소문난 가나자와 일대의 겨울 바다에 내동댕이쳐진 목선은 선원들만 가까스로 해안가에 내려 놓은 채 마지막 거친 숨을 토해낸 듯했습니다.
가나자와 서경찰서 아베 히로시 부서장은 당시 목선에서 발견된 시신을 부검한 결과 지난 해 9월께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RFA, 자유아시아방송에 밝혔습니다. 숨진 선원들을 태운 채 4개월 여 동안 고향 항구로 되돌아 가지 못하고 바다를 떠돈 '유령선'이었다는 겁니다. 아베 부서장은 늦어도 3월 셋째 주까지 시신을 가나자와시 당국에 인계할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약없이 거친 바다를 외롭게 떠 다녔던 북한 선원들의 유골은 연고 없는 사망자를 처리하는 일본 내 절차에 따라 일정 기간 보관된 뒤 무연고자 묘에 안장됩니다. 일본 아키타현 오가시의 유서깊은 사찰인 도센지에는 10구의 북한 선원 유골이 안치돼 있습니다. 고지마 료젠 주지 스님은 매일 아침 법당 한 켠에 마련된 제상에 놓인 흰색 유골함을 앞에 두고 이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법경을 읊습니다. 제상 앞에는 배와 사과, 귤 등 제물과 조화가 담긴 화병이 놓였습니다.
아키타현 사찰 도센지에 북 선원 유골 10기 안치
매일 제 올려…재일동포∙일본인 감사편지, 성금도
고지마 주지 스님은 오가시의 의뢰로 연고가 없는 유골을 받아왔는데 지난해 겨울 갑자기 유골이 늘었다고 말했습니다.
고지마 료젠: 보통 1년에 무연고자 유골 4-5구를 받는데 지난해 11, 12월에만 10구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이제껏 무연고자 유골의 신원을 확인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 수가 너무 많아 시 당국에 확인했고 북한 목선에서 발견된 시신이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1950년 대 부친이 절의 주지로 있을 때부터 무연고자 유골을 받아 왔는데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유골이 들어오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고지마 료젠: 이전에도 아마 북한인 유골이 일부 있었을 겁니다. 사실 갑자기 유골이 너무 많아져 유골함을 놓을 장소가 비좁아 고민입니다.
북한인 유골을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직접 절을 찾아와 감사 인사를 하고 간 사람도 있고 감사편지도 여러 통 받았습니다.
고지마 료젠: 10여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재일교포 2세, 3세라며 파도에 휩쓸려 죽어간 불쌍한 북한 선원을 위해 제를 올려줘 고맙다고 했습니다. 한 재일교포 여성은 북한 선원들이 연안 어장이 중국에 팔리는 바람에 먼 바다까지 나와야 했다며 불쌍하다고 했습니다.
일본인 중에서도 고맙다는 편지를 보낸 사람도 있었고 제를 올리는데 써 달라며 돈을 보낸 사람도 있습니다. 북한 목선이 자주 떠내려 오면서 일부에서는 반감도 생겼다고 들었지만 전혀 그런 기류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고지마 료젠: 5천엔부터 1만엔까지 현금을 보낸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돈을 오가시에 가져갔는데 절에서 알아서 쓰라고 해 그냥 보관하고 있습니다. 북한인 유골 보관과 관련해 한 일본 기자가 욕설이나 괴전화를 받은 적 있냐는 질문을 하길래 없다고 답했습니다.
"북한 유골이라고 차별하면 도리 아냐"
"북의 유가족에 작은 위안이라도 되길"
그는 북한 선원들의 유골을 앞에 두고 매일 제를 올리는 게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고 겸손해 합니다.
고지마 료젠: 제를 올리는 건 저의 임무일 뿐입니다. 북한인 유골이라고 차별하면 도리가 아니지요.
오히려 북한 선원들이 불교신자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고 털어놓습니다. 고지마 스님은 유골을 가족 품으로 돌려 보내는 건 자신의 능력 밖이라면서도 유골이 절에 봉안된 사실이 북한에 남아있을 가족들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되길 희망했습니다.
고지마 료젠: 제가 매일매일 제를 올리고 있다는 점에 안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북한 선원들의 유골이 안치된 법당에서 50미터쯤 떨어진 산 언덕에는 무연고자를 위한 납골묘가 있습니다. ‘무연묘비(無緣墓碑)’라고 쓰인 화강암 아래가 유골이 보관될 장소입니다. 고지마 스님은 내년 봄께 북한 선원들의 유골도 이 곳 납골묘에 안치될 예정이라고 말합니다.
고지마 료젠: 1년 정도 법당에 유골을 모신 뒤 안치합니다. 내년 이른 봄쯤이 되겠네요.
지난 7일 RFA, 자유아시아방송이 찾은 납골묘는 환한 오후 햇살에 포근히 안긴 모습이었습니다. 납골묘 위는 주변에서 쉽게 눈에 띄는 눈도 다 녹았고 야산을 등진 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년 따뜻한 어느 봄날 북한 선원들은 멀리 바다 건너 고향땅을 바라보며 이 곳에서 영면에 들게 됩니다.
북한, 미국 등 국제사회에 '대화' 신호
다시 표류 않게 국제사회 조정 절실
일본 해안에 떠밀려온 북한 목선의 시신을 거둬 제를 올리고 좋은 묘지에 안치하는 것 못지않게 고깃배가 유령선이 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건 중요합니다. 마침 북한은 한국과 미국 등 국제사회를 향해 대화의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북한이 세찬 풍랑 속에 방향을 잃고 일촉즉발의 위기로 다시 표류하지 않기 위해 '닻을 쥔' 국제사회의 조정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그럴 때 북한 어부들이 탄 고깃배 역시 '유령선'으로 떠돌지 않고 항구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아키타현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정우입니다.